돌아보면 개처럼 일해본 적 한 번도 없습니다.
대학교 때 과외도 안 했습니다. 학생은 학업에 더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연애하느라고 수업은 뒷전이었습니다.
윤루카스 작가가 쓴 <차가운 자본주의>를 읽었습니다. 우연히 교보에 갔다가 눈에 띄어서 펼쳤는데, 알 수 없는 독기와 절박함의 문체가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그 책을 끝까지 읽어갈 무렵 이런 제목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고객이 계산할 때는 식사하면서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형식적인 말투가 아니라 진솔한 말투로 살폈고, 손님이 나갈 때는 항상 90도로 인사했다. 20살 손님이라고 해도 말이다. 고객이 취해 나에게 윽박지르더라도 내 표정은 오히려 더 밝아졌으며, 카드를 땅바닥에 던지며 계산하라고 해도 1초 만에 주워서 카운터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그 고객에게도 식사하면서 불편한 것을 환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카드를 바닥에 던졌던 그 고객은 그 자리에서 팁을 10만 원 꺼냈다. 10만 원보다 울컥했던 것은 그가 내게 한 말이었다. "오십 평생 자네 같이 서비스하는 사람 처음 본다."
그의 글을 읽고 심히 부끄러워졌습니다. 난 한 번도 세상을 향해 이토록 간절해 본 적 있었나 싶었습니다. 내가 아직 성공하지 못한 건 내 능력이 부족해서도 세상이 불공평해서도 운이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삶에 대한 간절함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모두가 그처럼 절박하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닐 겁니다.
다만 스스로 부끄러운 것은 내 삶의 대한 나의 인식입니다. 나는 그래도 제법 당당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내 보잘것없는 자존심을 지키느라 애쓰던 모습이 그저 안쓰럽습니다. 술을 좋아하진 않지만 오늘은 혼자 소주를 한잔하고 싶은 날입니다. 인생이 쓰다는 것을 조용히 마음으로 삼켜보려 합니다.
글을 읽는 내내 따갑고 아팠습니다. 글이 날카로워서인지, 그 삶의 고달픔이 전해져서인지,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이십 대 중반의 작가에게 삶의 정말 중요한 자세를 배웁니다. 배움에 나이가 무슨 소용일까요. 나이가 들도록 지혜롭지 못한 자신을 더 반성할 뿐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합니다. 돈 받은 만큼 일한다는 얄팍한 생각은 가난으로 처박히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자세로 무슨 경쟁력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 자신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구구절절 그의 말이 옳습니다. 이제는 머리로 이해하지만, 여전히 삶의 곳곳에서 그렇게 실천하지 못한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윤동주의 <쉽게 쓰어진 시>가 생각납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를 청해야겠습니다.
* 매일 책 속의 좋은 문장을 나눕니다.
* 오늘 문장은 윤루카스 <차가운 자본주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에서 발췌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