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변대원 Jul 12. 2019

#_지혜의 신체성에 대하여

자기를 닮은 지혜를 잉태하는 삶

“나는 몸이자 영혼이다.” 어린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어찌하여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이야기하지 못하는가? 그러나 깨어난 자, 깨우친 자는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몸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영혼이란 몸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 몸은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이고, 가축 떼이자 목자이다. 형제들이여, 너희들이 ‘정신’이라고 부르는 그 작은 이성 역시 너의 신체의 도구, 이를테면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장난감에 불과하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요즘 지혜의 신체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지혜란 머리로 사유해서 얻어진 결과물이 아니라, 온몸으로 각성한 것이라는 결론이다. 예컨대 독서 역시 눈으로 보는 독서와 머리로 이해하는 독서, 가슴으로 공감하는 독서, 온몸으로 전율하는 독서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그저 텍스트에 불과한 기호가 머리를 넘어 가슴을 치고 온 몸으로 각성될 때 지혜는 완성된다. 그것은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 결국 철학은 머리로 사유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깨닫는 과정이다.

지혜로 각인된 앎은 행동을 수반한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동기가 부여된다. 삶이 그런 강력한 힘에 이끌릴 때 비로소 변화가 시작되는 게 아닐까?


철학자들은 산책을 좋아한다고 한다. 끊임없이 산책하고 여행하며 사색하는 이유는 신체적 활동을 수반하는 정신적 사유가 훨씬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배움은 책상이 아니라 자연에 있다. 진정한 가르침은 말이 아니라 행동에 있다.

지혜는 그런 것이다. 각자 삶을 통해 자기를 닮은 지혜를 잉태하는 수밖에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_관계를 묻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