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관계는 표현되는 말로 다 드러나지 않는다
어제 저와 고등학교 동창 한 명(K)과 독서모임 멤버(J)가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K는 저와 무척 성향이 다르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친한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습니다. 가까이 있어도 연락도 자주 안 해요. 하지만 함께 10년 넘게 한 회사에서 일하기도 했고, 같이 독립해서 사업도 했었고요. 그만큼 서로가 평생 절친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J는 몇 년 전부터 알게 된 작가님이자, 작가가 되기 전부터 함께 독서모임을 하며 친해진 분입니다.
지난 글에 소개했듯이 제가 목요일까지 단식을 했었는데, 단식은 저보다 J가 먼저 시작했던 분야여서 우연히 이야기하다 이번에 같이 하게 되었거든요.(저는 72시간, J는 48시간) 그래서 어제는 단식을 마치고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날이라 먼저 J와 약속을 잡았었는데요. 이전에 업무적으로 K와 J를 소개해 준 일이 있었는데, 유선상으로 일이 다 처리되어서 나중에 언제 한번 보자는 막연한 약속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마침 만나기로 한 강남역 부근은 K의 사무실 근처이기도 해서 K도 합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둘 다 무척 잘 알지만, 저 외에 두 사람은 처음 만나는 자리가 급조된 것이죠.
저는 가장 먼저 카페에 도착해 있었고, 약속한 대로 J가 먼저 도착했습니다.
단식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J는 배고파서 빵도 하나 먹어야겠다며 간단한 머핀도 곁들여 먹으며 대화했습니다. 우리의 주된 이야기는 책이야기, 글이야기, 먹거리와 단식이야기 등등인데요.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K가 도착했습니다. K는 처음부터 일찍 만나기는 어렵다고 11시쯤 온다고 했었거든요.
그렇게 조금은 어색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주도권을 K가 가져가게 되면서 요즘 살아가는 일상에 대한 대화들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아주 친한 친구지만 평소에 수시로 연락하면서 안부를 묻는 그런 스타일의 관계가 아니다 보니 저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친구는 대화 중에 불쑥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실 저희가 별로 안 친해요. ㅋㅋㅋ"
저도 맞장구쳤습니다.
"맞아, 별로 안 친하지. ㅋㅋㅋ"
이후에도 K는 중년의 가장이 겪고 있는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이야기들을 자주 했고, 저 역시 깊이 공감하면서 들었습니다. J는 아직 자녀가 없는 30대 신혼부부라 관심 없는 주제일 수 있었는데, 다행히 즐겁게 대화에 참여하며 경청해 주었습니다. 제가 배가 고프다고 해서 이동한 곰탕집에서도 대화는 계속되었습니다. K는 요즘 매일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해서 뭘 하냐고 물어보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당구"라고 대답하질 않나. 암튼 시간이 갈수록 저와 평소에 대화하는 느낌으로 바뀌어가는 K였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의 2-3시간의 짧은 만남은 정말 '번개'라는 말과 잘 어울리게도 순식간에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친구가 말했던 "저희가 별로 안 친해요"라는 말이 기억났습니다. 그 말이 섭섭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진짜 친한 친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정말 친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서로 친하지 않은 사이라고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게 말하기는 어려운 법이잖아요. 그래서 자주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지요. 하지만 절친이라면, 서로 우리 안 친하다고 말한다고 오해할리도 없고, 웃어넘길 수 있는 정말 편한 사이라면 가능하겠지요.
문득 '진정한 관계는 말로 표현되는 걸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K는 제가 가장 힘들 때 제가 묵묵히 많은 도움과 힘을 주었던 친구인데요. 생각하는 방식이나 라이프스타일 등 성향은 거의 정반대에 가깝지만, 사람을 대하는 진심 어린 마음만큼은 참 닮았고 비슷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 때는 친하고 좋아하는 친구지만 이해 안 되거나 대화가 안 통해서 힘들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다름으로 인해 그의 어떤 부분을 깊이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서로의 마음에 난 길이 관계다.
당신에게도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 있기를 바란다.
림태주 작가는 <관계의 물리학>에서 서로의 마음에 난 길이 관계라고 말했습니다. 친한 벗은 타인이 아니라, 떨어져 있는 또 하나의 나이기도 합니다. 그건 가족도 마찬가지겠지요. 좋은 관계일수록 그 길이 아름답고, 정갈합니다. 무엇보다 막혀있지 않고 잘 이어져 있지요. 이야기가 길어져서 J이야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제의 주인공은 단연 K였으니까요. 할 일이 많은 금요일이었지만, 소중한 두 명의 벗을 만나고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날씨도 눈부시더군요.
행복한 인생이란 결국 좋은 관계가 쌓여서 만들어집니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관계의 길을 생각해 보게 되는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