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볼펜에 채워진 시간이라는 잉크
이제는 익숙해져서 볼펜이 금방 다 닳아도 그러려니 하는데, 처음에는 그게 적응이 좀 잘 안 되었습니다.
'아니, 이거 얼마 쓴 것 같지도 않은데, 왜 벌써 심이 다 닳은 거야? 뭐지?'
이상했습니다. 볼펜을 많이 쓰지 않을 때는 보통 1년을 써도 여전히 멀쩡했고, 볼펜을 여러 개를 돌려쓰다 보니 몇 년째 쓰고 있는 것도 많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필사를 하면서 항상 쓰는 펜으로 매일 적다 보면 생각보다 금방 다 쓰더군요.
문득 볼펜심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쓰고 있었던 제 자신의 모습이 인생과 오버랩됩니다.
나는 내 삶이 마치 영원할 것처럼 살고 있진 않은가?
내가 내일 죽을지 10년 뒤에 죽을지 모르는데, 아니 오래오래 살더라도 결국 몇십 년 뒤면 삶이 끝나는 순간이 올 텐데. 나는 내 인생에 채워져 있는 시간이라는 잉크가 매일 닳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볼펜은 쓰지 않으면 닳지 않지만, 인생이라는 펜에 채워져 있는 시간은 내가 무엇을 쓰든 안 쓰든 매일 닳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인생의 잉크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고요.
딱히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많이 써놓지도 못했는데, 벌써 잉크가 반쯤 줄어들어 있네요.
남은 잉크로 무엇을 쓸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시간도, 글도, 내 몸도 매일매일 조금 더 알뜰히 써야겠습니다.
볼펜심은 다 쓰면 새 걸로 교체하면 되지만, 우리 삶은 그렇지 않으니까 말이죠.
죽음은 종말이지만, 그런 만큼 질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리의 탐구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