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름을 갓 떠나온 가을이었는데, 이제는 겨울을 목전에 둔 가을이 된 듯합니다. 오전부터 일정도 많았고, 짐도 많은 상태로 지하철을 타고 사무실로 오는데 어깨가 무겁습니다. 시간은 어느덧 12시. 사무실에 들어가서 일을 시작하면 점심식사가 너무 늦어질 것 같아서 가는 길에 먹고 가려고 합니다. 뭐가 좋을까 둘러보는데 자주 다니던 길 옆으로 '추어탕'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예전에도 본 것 같은데, 워낙 허름하고 조금 외진 곳에 있는 느낌이라 가볼 만한 생각을 안 했었는데요.
쌀쌀해지는 날씨에 뭔가 뜨끈한 추어탕 한 그릇이 제법 근사할 것 같아서 가게 문을 열어봅니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손님이 무척 많습니다. 1인석을 찾아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자리를 잡습니다.
서빙하시는 분이 오더니 물과 찬들을 내려주십니다. 그리고 보통 같으면 뭘 주문할지 물어보는데, 대뜸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탕 하나 드릴게요."
잉? 뭐죠?
뭔가 이상해서 주변을 둘러봐도 메뉴판이 없습니다. 심지어 벽에도 붙어있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추어탕 먹으러 온 거고 다른 메뉴는 먹을 마음이 없어서 잠시 기다려 봅니다.
몇 분 뒤 뚝배기 안에서 펄펄 끓고 있는 추어탕이 나옵니다. 특별해 보일 게 없습니다. 함께 나온 다진 마늘을 넣고, 자리에 미리 구비된 제피(산초) 가루와 들깨가루를 제 취향에 맞게 넣어봅니다. 그리고 한 입.
'아~'
이 집 맛집임을 직감합니다.
처음부터 세팅되었지만 아직 손대지 않고 있었던 김치와 깍두기를 집개와 가위로 적당히 썰어놓고, 깍두기부터 하나 집어먹어 봅니다. 맛있습니다. 다음은 김치와 열무김치 순으로 맛을 봅니다. 역시 맛있네요. 짜지도 맵지도 않고, 딱 적당합니다. 특히 열무김치는 그냥 먹어도 꿀맛입니다. 뜨거운 탕과 시원한 김치의 궁합이 일품입니다. 밥은 말지 않고, 조금씩 먹으며 탕을 따로 먹습니다. 그래야 불어서 죽처럼 되지 않고 각각의 식감을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제 취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집은 추어탕 하나만 제대로 하면서 함께 먹는 반찬 3종세트 역시 기본에 충실한 숨은 맛집이었습니다. 제 단골리스트에 추가될 것 같네요. 어찌나 맛있던지 마지막 한 숟갈까지 깨끗이 먹었네요. 식사를 반쯤 했을 때 미리 가져다준 수정과를 한 모금 마셔봅니다. 뜨끈한 탕을 먹고 난 후 시원한 수정과라니 훌륭합니다. 자, 이제 마지막 관문이 남았습니다. 가격은 얼마일까요. 12000원 정도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만, 위치나 분위시상 1만 원 정도 하면 대박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계산대로 향합니다.
"맛있게 드셨어요? 9천 원입니다."
카드를 내밀며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네, 정말 맛있네요. 잘 먹었습니다."
"아 ㅎㅎ 네 감사합니다."
아니 가격마저 착하다니..
이제 한 달에 1~2번은 꼭 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메뉴판도 없고, 주문도 받을 필요 없이 한 가지 메뉴를 정말 제대로 맛있게 만드는 가게라니. 개인적으로 이런 가게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만두에 정말 진심인 집, 소금빵에 진심인 집, 추어탕에 진심인 집까지 이 동네에서 이렇게 한 군데씩 새로운 맛집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네요.
한 가지만 판다는 건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일 겁니다.
굳이 수십 개의 메뉴를 팔지 않아도 이 하나로 그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확식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음식점은 하나라도 정말 제대로 맛있게 하는 게 멋있는 겁니다. 정신없이 먹느라 다 먹고 나와서야 사진을 찍었네요.
식사를 하며 이런 질문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나는 어떤 한 가지 가치(추어탕)를 이렇게 자신 있게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
그것과 함께 제공되는 부가적인 가치(김치, 깍두기, 열무김치)는 핵심가치를 제대로 보완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변별력 있게 접근할 수 있는 가치(들깻가루, 마늘, 제피가루, 다진 청양고추)가 있는가?
일본 요식업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우노 다카시가 책에 남긴 문장이 생각납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살아남는 강한 가게는, 실질적인 의미에서 손님들에게 이득을 주는 가게야.
나는 나를 만나는 분들에게 어떤 이득을 주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하는 일은 달라도 그 일의 본질은 다 비슷하니까요. 오늘 점심 참 맛있게 먹고, 한 수 제대로 배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