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것이 존재와 관계를 규정한다.
집 근처 커피숖에 새로운 배너광고가 하나 생겼습니다.
귀여운 캐릭터와 먹음직스러운 와플사진이 담겨있는 배너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습니다.
와플은 못 참지
'24초 전은 못 참지'
'고양이는 못 참지'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OO은 못 참지'라는 문구들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응용해 보면,
'독서할 때 커피는 못 참지'
'김장하고 수육은 못 참지'
등의 예시를 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말에 의미를 담아 해석하긴 어렵지만, 이 말은 요즘 현대인들의 태세를 정확하게 관통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 현대인들은 참고 산다.
못 참겠다는 말이 담고 있는 이면의 상태는 '나는 지금 참으면서 살고 있어'일 겁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갑니다. 원하는 삶이 있으나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여건이나 능력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지요. 물론 일이 바쁘다 보니 먹고 싶은데 못 먹고, 자고 싶은데 못 자는 그런 단순한 신체적 욕망도 있을 겁니다. 그런 욕망들은 욕구불만이 되고, 각자의 삶의 기준에서 허용가능한 어떤 지점에서 "못 참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이건 못 참지'라는 말은 현대인들의 욕망을 풀어주는 소소한 돌파구인지도 모릅니다.
2. 현대인들은 참지 못한다.
못 참겠다는 말을 통해 현대인들은 참지 못하는 성향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너무 다양한 자극이 손쉽게 주어집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끊임없이 도파민을 분비시킬 수 있고, 조금만 걸어가면 있는 수많은 편의점이나 커피숖, 음식점 등을 통해 손쉽게 먹을거리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신도 육체도 무언가를 참을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편리해진 덕분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참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참을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가장 많은 사람이 참고 있는 것은 대체로 '잠'을 텐데요. 잠을 깨우고 각성시키는 커피를 이토록 많이 마시게 된 것도 조금은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3.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런 맥락에서 우리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각자의 삶은 결국 무엇을 참고 있고, 무엇을 참을 수 없는가로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월급을 많이 줘도 관계로 인한 갈등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있겠죠. 아무리 피곤해도 'OO은 못 참지'라고 말하며 하게 되는 행동들이 있을 겁니다.
못 참는다는 것이 결코 나쁜 의미라고 볼 수 없습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이 어쩌면 가장 나다운 취향을 드러내는 순간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를 들어 일주일 내내 야근하고 피로가 엄청나게 쌓였음에도 굳이 장비들을 챙겨서 야외로 캠핑을 가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귀찮고 힘든 노동일 수 있는 캠핑이, 그에게는 죽어도 포기 못하는 나만의 힐링 포인트일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 좋은 것인가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찾아서 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마다 참을 수 있는 것이 다르고, 참을 수 없는 것이 다르니까 말이죠. 그건 삶의 보편적 우선순위와는 전혀 다른 지극히 개인적인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잘 견디는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참을 수 없는 사람인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생각지도 못한 내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결국 참을 수 없는 것이 그 존재와 관계를 규정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무것도 참을 필요가 없는 상태는 둘 중 하나입니다.
아무런 자극도 소용없는 학습된 무기력의 상태이거나,
의식적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온전한 자유의 상태이거나.
우리가 어떤 상태를 추구해야 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학습된 무기력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나저나 집 근처 카페 앞에 놓인 "와플은 못 참지"라는 문구는 재미있게 마케팅하려고 했던 것일 텐데요.
제가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덤빈 꼴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ㅎㅎ 하지만 제 입장에서 어떤 영감이 떠오르면 "글감은 못 참지"라는 마음이 들어서 어느 날 메모해 둔 제목을 이제야 글로 풀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