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꾸준히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장려합니다. 매일 무언가를 한다는 것만큼 나의 정체성으로 확실하게 만들 수 있는 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강생 중 한 분과 대화하던 중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신이 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별로 쓰고 싶지가 않다고요.
맞아요. 너무나 공감되는 말이었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그런 경험을 했었고, 지금도 늘 충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매일 글을 쓰고 있으니까 말이죠.
내 글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왜 그럴까요?
제 경우에는 2개의 비교군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는 내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글입니다.
먼저 내 생각입니다.
생각은 자유롭죠. 그러니 마음속에서는 어떤 심상이 그려지기도 하고, 감정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걸 문자라는 틀로 표현하려니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 정말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반가운 친구를 만났는데, 마음은 정말 정말 반가운데, 뭐라고 표현할지를 모르겠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저 '잘 지냈어?'라고 안부를 묻는 게 고작이겠지요.
글로 표현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정말 반가웠다."라고 쓰는 거 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표현해 보지 않았던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평소에 자주 먹던 김치는 처음 가본 식당에서 반찬으로 먹어도 쉽게 맛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집은 김치가 좀 짜다. 젓갈이 많이 들어갔다. 덜 익었다. 등등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많을 겁니다. 그 집 김치는 처음 먹어보지만, 내가 그동안 김치를 좋아해서 여러 종류의 김치 안 먹어 본 게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죠.
우리는 결국 무엇이든 그동안 반복해서 경험함으로써 익숙해진 것에 편안함을 느낍니다. 반대로 이전에 경험이 부족한 일은 익숙지 않기 때문에 불편합니다. 아주 쉬워 보이는 일도 해보지 않은 일은 서툴기 마련이죠.
이게 글을 쓰는 게 힘든 첫 번째 이유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우선 내 생각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늘 회사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면, 나는 왜 기분이 나빴는지, 그래서 어떤 마음이 생기는지, 어떤 감정변화가 일어나는지 바라보면서 적어볼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좋은 글쓰기 훈련이 됩니다. 이런 글쓰기는 사색적 글쓰기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가진 생각을 글자로 옮겨놓는 작업입니다.
두 번째 글을 쓰기 힘든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글과 비교되기 때문일 겁니다.
나는 훨씬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데, 남들처럼 세련되게 써지지가 않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남들"이라는 모호한 대상이 과연 누구냐는 겁니다. 제가 곰곰 생각해 보니 저의 경우에는 저보다 글을 잘 쓰는 모든 사람이더군요. ㅎㅎ
지금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나보다 훨씬 이전부터 더 많은 글을 읽고 써왔을 가능성이 99%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부분도 경험의 차이겠죠. 하지만 이 지점에서는 조금 다른 대안이 존재합니다.
내 글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건 지금 내 글보다 더 나은 글을 많이 읽어봤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글을 많이 읽어보지 않았거나 글을 여러 편 써보지 않고서는 내 글이 부족하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죠. 즉, 내 글이 부족해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자, 이때 내가 쓰는 글이 더 좋아지는 방법은 꾸준히 쓰는 것을 넘어서 내가 쓰고 싶은 수준의 글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마치 요리를 하기 위해 재료와 레시피를 확보하는 과정과 흡사합니다. 내가 비슷한 맛을 내기 위해서 어떤 재료를 어떻게 넣고 어떤 게 조리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죠.
글쓰기를 훈련하는 방법 중에 다른 작가의 좋은 글을 필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건 정말 효과가 있는데요. 그 작가의 멋진 글을 내가 직접 손으로 한 자 한 자 적어나가면서 레시피를 익히는 과정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단순히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꼭 책 전체를 필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좋았던 일부분만 필사해 보는 것도 충분히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더 많은 책을 읽고, 필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여러 공간에 내가 읽은 글들이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서 나중에 내가 글을 쓸 때 활용할 수 있는 재료가 되어줍니다. 이런 글쓰기는 표현적 글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사고의 범위를 확장해 나가는 일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문장처럼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내가 읽고 쓰고 말한 만큼 확장됩니다.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글을 써야 하는 이유 모두 다 한 번에 명쾌하게 관통하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하고 싶다면, 지금까지 몰랐던 더 많은 언어적 지식을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문어와 낙지, 꼴뚜기를 다 구분하는 단어가 있지만, 영어에는 octopus라는 단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저 크기로만 구분할 뿐이죠. 이처럼 언어가 없으면 인식의 한계가 명확해집니다.
어릴 때부터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본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나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인식의 범위가 훨씬 넓어질 수 있을 겁니다. 비문학 도서를 많이 읽은 사람은 세상을 보다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인식의 범위가 넓어질 수 있겠죠. 어떤 경우든 결국 더 많은 언어적 표현을 경험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사유의 확장을 할 수 있게 되고, 단순히 읽기만 할 때는 쉽게 잊어버리는 것들도 내가 글로 쓰고 나만의 언어로 정리하는 과정이 병행되면서 사고체계가 견고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그런 일입니다.
지금 내 글이 마음에 안 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내 사유의 속도가 내 표현의 속도를 앞질러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잠시 비교는 내려놓기로 합니다.
지금 글을 못쓰거나, 지금 모르는 지식이 많은 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내 선택의 결과일 뿐이니까요.
정말 부끄러운 것은 1년 후, 3년 후, 5년 후에도 지금과 다를 바 없을 때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부족한 나를 기꺼이 안아주고, 인정해 주세요.
그리고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 성장합시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인생은 마라톤이라는 말이 있지요.
아시다시피 마라톤은 1등이 아니라, 꼴찌로 들어와도 손뼉 쳐주는 종목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라톤에 참가조차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주자체가 의미있는 일입니다. 내가 마라톤 코스 위를 달리고 있는 중이라면 나는 이미 누구보다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정작 부끄러워할 사람은 꼴찌가 아니라, 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글쓰기도 마라톤입니다. 마치 인생처럼.
그러니 내가 남들보다 늦게 뛰고 있다고 불안해하지 마세요.
인생이 마라톤과 다른 점은 저마다의 삶의 코스와 목적지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중요한 건 오늘도 '내 인생'이라는 마라톤 코스를 뛰고 있는지, 내가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서 전진하고 있는지 그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