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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Feb 14. 2024

#_신이 나에게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신이 다정하게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는 신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신의 정체조차 몰랐음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오면서 이해한 신을 개념적으로만 상상할 수 있을 뿐, 신과 함께 살아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매주 교회를 가고 정해진 규칙을 지키고, 때론 그 속에서 방황하면서 때론 신을 만나고 때론 나를 만나며 살아왔습니다.


이제와 돌아보니 신은 나와 함께이지 않은 적이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그저 내가 끊임없이 신을 내 마음대로 규정하고 제한하여

그저 '거룩하고 신성'하기만 한 아주 멀고 닿기 힘든 존재로 만들었을 뿐.


신이 모든 곳에 존재한다면, 신은 밝은 태양일 수 없습니다. 태양이라는 작은 단어로 신을 말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밝음과 어둠, 앎과 무지, 화나는 상황과 좌절의 순간에도 신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 있는 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신을 닮은 우리 역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테지만 나는 내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심지어 그 '가능성'조차 반신반의하면서 그 결정을 신에게 떠넘기려 했습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조차 없었으면서 일주일에 한 번 교회를 다니는 행위만을 믿음의 증거로 삼고 있었습니다.


신은 창조자이며, 신과 연결된 우리 역시 창조자입니다. 창조는 삶의 본질이자, 인생의 목적입니다.

내가 삶을 통해 더 나은 무언가를 창조하고 있지 않다면, 나는 본질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스스로 눈을 가리고 안주한 삶을 털고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시 삶이라는 찰흙 덩어리를 붙잡고 시간이라는 물레 위에서 매 순간 가장 아름다운 모양을 빚어내는 과정입니다.


신은 지옥이라는 것을 만들지도 않았건만, 나는 천국과 같은 풍요 속에서도 지옥을 맛봐야만 했습니다.

삶은 고통이라는 명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나의 하찮음을 끊임없이 상기하면서, 나의 부족함을 매 순간 정죄하면서 나를 마음의 감옥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신이 우리에게 준 것은 거대한 기회입니다. 삶이라는 가장 비싼 여행을 선물해 준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1년간 유럽여행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여행권을 준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렇다면, 우리 인생은 그 행복의 100배, 1000배 값진 것으로 느껴야하지 아닐까요?


신이 나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고.


저는 당신이 선물해 준 여행 중에 있습니다.

그 여행은 당신에게서 출발하여 당신에게로 돌아가는 여행입니다.

그 여행은 나에게서 출발하여 나로 돌아가는 여행입니다.

고향(나)에서 출발하여 타지(내가 아닌 것)를 경험함으로써 진정한 고향(천국, 나의 존재성)으로 돌아가는 여행입니다.


성부(聖父)는 모든 이해의 부모요, 모든 체험의 원천인 앎이다. 왜냐하면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체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자(聖子)는 아버지가 자신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의 체현 또는 육화(肉化, embodiment)인 체험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존재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신(聖神)은 아들이 자신에 관해 체험한 모든 것의 탈육화(脫肉化, disembodiment)인 존재다. 그것은 오직 알고 체험한 것에 대한 기억을 가질 때만 가능한 소박하면서도 절묘한 있음 is-ness이다.
이 소박한 있음은 더없는 기쁨이다.
-닐 도널드 월쉬 <신과 나눈 이야기> 중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삼위일체를 들었으면서도 나는 신과 내가 동떨어진 관계라고 착각했습니다. 스스로의 신성(神性)을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끊임없이 신의 임재를 갈망하는 모순 속에 살았습니다.


아버지(부모)는 아들(자식)을 낳고 가족이 탄생합니다.

생명의 섭리는 진리 그 자체임을 깨닫습니다.


성부 아버지는 신이고 앎이며 진리입니다. 모든 체험(아들)의 원천입니다.

성자인 아들은 체험이자, 삶이고 느낌이며 깨달음입니다.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존재(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은 존재이자, 우주 그 자체이며 전부입니다. 있음이자 없음이고, 축복과 경이, 질서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가족관계도입니다. 셋은 따로 나누어 설명하지만 결국 하나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소한 앎을 체험함으로 더 나은 존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나 상황에서 조차 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은 한 번도 나와 떨어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가족)의 일부분이자, 가족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다시 아버지가 되고, 딸은 다시 어머니가 되듯 창조하고 순환하는 것이 신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말과 글은 모든 앎을 담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체험을 통해 새로운 나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내면의 신성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창조이며, 신(개념적)에게서 출발하여 신(체험적)에게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결국 내 삶 자체가 신을 증명하는 과정인 셈입니다.


서로 사랑이 충분하지 않은 관계에서는 수많은 규칙이 필요합니다.

돈은 누가 내고, 일은 누가 하고, 전화는 언제 하고 등등 따지고 계산해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충만한 관계는 그런 사소한 규칙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존재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서로 억지로 이해하려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충만히 느낄 수 있을 뿐이죠.


신의 섭리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의 충만한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령 신이 아무리 인간의 언어로 쉽게 설명한들 알 수 없을 겁니다. 하여 그것과 비슷한 것을 인간의 수준으로 이해한 종교의 법도가 탄생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명령'으로 이해했지만, 신이 설명한 것은 '현상'이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은 이미 넘치도록 충분하기에 타인을 죽여 무엇을 빼앗을 필요도, 간음하여 불필요한 것을 욕망할 필요도 없음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컨대 내가 이미 수조 원의 재산이 있고, 수백 명의 배우자가 있고 그 속에서 충만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면, 굳이 살인하거나 간음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미 내 통장에 넘치도록 많은 돈이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내 통장에서 돈을 뽑으러 가면 되는 일입니다. 이미 충만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이성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고요. 이미 가진 것을 누리기도 아까운 시간에 그것의 일부만도 못한 것을 얻으려는 행동이 무의미하다는 당연한 '현상'을 설명한 것입니다.


충만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결핍이 생기는 것이고, 타인의 돈과 사랑을 갈구하게 되는 것일 뿐이니까요. 그러니 죄악의 본질은 살인과 간음이라는 현상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가진 충만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의 사랑이 너무 크고 온전하고 완벽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입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갑자기 찾아와 고급승용차와 멋진 집과 별장을 선물해 주고, 당신이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부와 행복을 선물해 준다면 아무 의심 없이 덥석 받을 수 있을까요? 그것과 비슷한 상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느낍니다. 이 놀라운 삶이라는 선물과 내 육체라는 선물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무지) 전혀 제대로 누리지도 쓰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커다란 축복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에 수천, 수만을 곱해도 메꿔지지 않을 만큼 크고 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범위가 수영장만큼 커다란 욕조라면 실제 크기는 바다보다 큰 상태라는 말입니다.


이 넘치는 기쁨과 충만함을 어떻게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지 있을지,

어떻게 서로 더 큰 충만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지금도 신은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너는 지금 어디 있느냐고.

나의 본체이신 당신의 아들이 여기 있다고 말해 봅니다.

매 순간 당신을 만나고, 삶으로 체험함으로 놀라운 존재의 본질을 깨닫습니다.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사야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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