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는 마침 시간 여유가 있어서 저랑 데이트를 하길 원했고, 저 역시 바쁘긴 하지만 잠시 데이트하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의도했던 것과 달리 저는 여전히 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여자친구를 만나는 내내 일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자친구의 이야기를 겉으로는 듣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래서 이번 달은 이 계약을 내일까지 꼭 성사시키고, 나머지는 다음 달 초에 진행하는 식으로 하는 게 더 낫겠지?'라는 식의 생각을 했던 것이죠.
만약 평소라면 여자친구도 저의 그런 시큰둥한 태도를 불쾌했을지도 모르지만, 바쁜 일정을 쪼개어 자기와 밥 먹으러 나와준 줄 알기 때문에 딱히 내색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다 그녀도 참기 힘들었는지 저에게 했던 말 한마디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자기야, 듣고 있어?
저는 바로 그녀에게 사과했습니다. 아직 일이 많이 남아서 생각이 많다고 솔직하게 말했더니, 다행히 이해해 주더군요. 밥만 먹고 얼른 다시 들어가 보라고 했습니다.
뭐, 흔히 남녀가 데이트를 할 때 겪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겁니다.
과연 제가 했던 건 데이트일까요? 데이트가 아닐까요?
제가 생각하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겉모양은 당연히 데이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데이트라고 부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라고 봅니다.
그날 이후 저는 온전히 상대에게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가급적 약속을 잡지 않으려고 합니다. '바쁜 와중에도 잠깐 얼굴 봤으니까 그걸로 됐다.'라고 의미 부여할 수도 있으나 저는 지금도 그때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릴 정도로 그날 나의 행동이 무척 상대에게 무례한 태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늘 독서를 연애에 비유해서 설명하곤 하는데요. 오늘도 같은 맥락입니다.
많은 분들이 제가 했던 저 날의 실수 같은 방식으로 책을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읽긴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소통되지도 않고, 그냥 들은 척 고개만 끄덕거리는 모양이랄까요. 심지어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그 어려운 걸 해낸 자신이 뿌듯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책은 필요 없다는 듯이 책장 구 석 한편에 꽂아둡니다.
과연 그건 독서일까요?
독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제가 생각하는 독서는 책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소통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대체로 책이 나에게 말하고 나는 책의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지만, 그것도 얼마든지 행복한 시간이 됩니다. 마치 연애할 때 여자친구 얼굴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은 것과 마찬가지죠. ㅎㅎ
제가 만약 저 날의 데이트를 마치고 사무시로 돌아가는 길에 뿌듯함을 느꼈다면 어떤 생각이 드실까요?
아마 여자분들이라면 저의 몰상식함에 화를 낼지도 모를 일입니다. 악플이 줄줄 달리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ㅎㅎ
책을 읽는 건 기본적으로 만남입니다.
그러니 제발 나랑 맞지 않는 책을 억지로 읽지 말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그 책이 어떤 유명한 연예인 또는 저명한 교수님에게는 매우 좋았던 책일지는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령 베스트셀러라고 해도 나와 맞지 않는 책을 억지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BTS나 뉴진스, 에스파, 아이브 같은 아이돌들을 좋아한다고 해서 나도 좋아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저는 대체로 좋아합니다만 즐겨 듣는 음악은 아닙니다. 저는 평소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에 좋은 재즈음악을 즐겨 듣는 편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키스 자렛이나 에디 히긴스, 빌 에반스 트리오의 음악들을 더 좋아합니다. 저를 아시는 분들은 이미 여러 번 들었던 이야기이시겠지만, 어제 수업 중에 독서에 대한 질문을 받고 보니 이런 글을 다시 쓰지 않을 도리가 없네요. ㅎㅎ
책을 읽고 뿌듯했다면 그건 제대로 된 독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무조건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 경험으로 좋은 독서 경험은 뿌듯함이나 성취감보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사람의 글을 더 읽고 싶은데 지금 끝나는 게 아쉬운 거죠. 그래서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보기도 하고, 작가가 소개한 책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기억하세요. 좋은 독서는 성취감이 아닌, 아쉬움을 남깁니다. 마치 좋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질 때처럼요.
어쩌면 우리가 어린 시절 무협만화나 순정만화를 보면서 오른손에 쥔 페이지의 두께가 얇아질수록 점점 천천히 읽으면서 끝까지 읽기도 전에 아쉬워하는 마음과 닮았습니다.
당신은 그런 책이 있으신가요? 그런 독서를 얼마나 많이 해보셨나요?
만약 아직 그런 책을 못 만났다면, 정말 죄송하게도 당신은 진정한 독서를 경험해 보지 못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