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책이 아니라, 내 수준에 따라
나는 책을 선물하는 걸 좋아한다.
그냥 사는 책과 선물한 책은 전혀 다른 책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선물하는 책에는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 마음에는 믿음, 희망, 응원, 격려, 사랑 등이 섞여있다. 그로 인해 똑같은 책이지만, 다르게 읽힌다.
책을 그저 '똑같은 책'으로만 보는 시선으로는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없다.
독서는 책을 통해 나와 세상을 만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책뿐만 아니라, 나의 수준이 독서의 질을 결정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좋은 책'만 읽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책도 나와 맞지 않으면 좋은 독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즉, 현재 나의 수준에서 수용할 수 있는 지식의 범위가 있게 마련이고, 그 지식의 범위의 끝가락에 적절히 걸쳐있는 책이 좋은 독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아래와 같다.
현재 나의 지식수준이 바로 "스키마 영역"이다. 참고로 스키마(Schema)는 배경지식이라는 뜻이다.
나를 기준으로 책을 A, B, C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A유형의 책은 재미있는 책이다. 책의 내용 중에 이미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더 많고, 20~30% 정도의 새로운 내용이 있다. 이런 책은 술술 읽히고, 속독이 수월하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 많아서 언뜻 비효율적일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재미있고 효율적인 독서다. 필자가 가장 권하는 책의 유형으로 이런 책을 연달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독서의 즐거움에 눈을 뜨게 된다.
B유형의 책은 어려운 책이다. 나의 현재 지식수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조금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더 많기 때문에 어렵다고 느껴진다. 책 읽는 속도가 느려지고, 쉽게 지루해질 수 있다. 진도가 안 나가니까 '역시 독서는 나랑 안 맞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들은 다 아는 걸 나만 모르는 것 같아 묘한 자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처럼 B유형의 책은 지금 내가 읽기에는 조금 어려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려운 만큼 우리 뇌에 더 신선한 자극을 주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정말 좋은 책이 될 가능성이 있다. 결국 핵심은 나의 현재 수준이다.
마지막으로 C유형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책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다. 철학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고 질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 같은 책을 읽어봐야 정말 1도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이런 책을 아예 읽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시도하는 건 얼마든지 좋다. 다만 내가 지금 읽을 수 없는 책이라면 빨리 덮을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좋은 독서란, 책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조금씩 책을 읽으면서 성장해 나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위 그림에서 보다시피 이전보다 나의 지식수준이 확장된 모습이다. 이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A유형의 책은 이제 시시해진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므로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 반면에 이전에 어려웠던 B유형의 책들이 재미있는 책으로 바뀌게 된다. 나아가 이전에는 전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던 난공불락의 책들이 이제는 어렵지만 읽을만한 책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과정을 '지적 성장'이라고 부른다.
지적 성장이란 내가 아는 지식의 수준이 확장됨에 따라 나와 세상을 이해하는 사고의 수준이 높아지는 과정이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들, 내가 추천받은 책들을 위 기준에 따라 다시 분류해 보길 바란다.
당신이 독서가 재미없다면 분명히 당신 책장에는 B와 C 유형의 책들만 가득할 것이다.(물론 아예 책이 없을 가능성이 더 높을 수도 있다.) 당신이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신 책장의 최소 30% 이상은 A유형의 책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사람에 따라 도서관을 많이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B유형의 책이 상대적으로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어떤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다.
나에게 맞는 책에서부터 다시 제대로 된 독서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편의상 원으로 표시했지만, 우리의 지식수준은 수많은 영역에 걸쳐 비대칭적으로 비죽비죽 뻗어져 있는 별모양 또는 나뭇가지모양과 더 비슷할 것이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는 더 많은 책을 만나봐야 알 수 있다. 늘 연애와 비슷하다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많이 만나봐야 나에게 맞는 책이 어떤 책인지 알 수 있고, 나의 현재 수준을 가늠할 수 있고, 지금 나의 취향을 파악할 수 있다.
모두가 똑같은 책을 읽어도 똑같은 독서는 단 하나도 없다. 책을 읽는 우리가 저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장담컨대, 이 사소한 관점 변화만으로도 당신은 책에서 엄청나게 많은 선물을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