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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Mar 09. 2024

#_'오늘'이라는 신의 테스트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평소보다 너무 환하다.

기분이 싸하다. 아무리 늦어도 5시 20분에는 일어나서 새벽독서모임을 하려 가야 하는데, 7시 25분에 눈을 뜬 것이다. 일단 단톡방에 이실직고했다. 물론 줌으로 모이지 않아도 참여하시는 분들은 저마다 좋은 시간을 보내셨을 테지만, 이건 운영자로서 예의가 아니다. 마음이 무겁다.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앞으로 더 신경 쓰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머릿속에 2가지 과제가 떠올랐다.

첫 번째는 나 자신에 대한 피드백이다. 아침에 일어나지 못한 원인은 수면부족밖에 없다. 오늘로 새벽모임이 딱 2달째인데 이미 2-3주 차부터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숙제다. 틈틈이 부족한 수면을 낮잠을 자거나 주말에 보충하려고 하지만,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아 어렵다. 언제든지 자려면 잘 수 있는데도 잠을 못 잔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런 면에서 별도의 잠을 보충하는 방법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가족들이 자는 시간보다 일찍 나 먼저 자는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모임운영에 대한 시스템화다. 현재는 미리 계획된 날에만 부운영자분이 대신 모임을 진행해 주는 식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부득이한 상황이 생기는 경우에도 평소와 동일하게 진행이 될 수 있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 부분은 우선 부운영자분과 상의해 봐야겠다.


비록 모임을 대차게 펑크 냈지만, 덕분에 직면하지 못했던 문제를 정확히 마주하게 되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고, 평소와 다르게 시작한 하루여도 변함없이 가치 있는 하루로 만들어야 하니까.

그렇게 샤워를 하는 동안 2가지 생각을 하며 나갈 채비를 마쳤다. 우리 모임의 너그럽고 멋진 분들이 오늘 나에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잠이었다고 위로해 주는 문자가 남아있다. 줌화면으로 만나지 않았어도 각자 조용히 책 읽는 시간을 가졌노라고. 감사한 일이다.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아침 8시. 평소라면 자고 있을 가족들도 깬 모양이다.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평소보다 2시간 늦게 시작했다고 해서 오늘을 망친 건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평소와 다른 사건이 벌어진 날, 더 특별한 시간으로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온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늘 깜깜하던 풍경이 아니라, 마치 정오처럼 밝은 풍경이 나를 맞이한다. 평소에도 늘 같은 시간에 봤을 풍경이지만, 이렇게 지각하고 마주하는 풍경은 그 느낌이 또 다르다.



'지금 이 순간'을 '오늘'을 '현재'를 외면하면 어떤 더 좋은 '나중'도 '내일'도 '미래'도 없음을 안다.

오늘 나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를 인정하고, 해결해 나가면 된다. 종종 시작부터 꼬이는 날이면, 그날 하루를 포기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가 많았다. 참 어리석었다. 평소와 다른 일이 벌어지는 날을 스스로 '망쳤다'는 마음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실제로 그날은 한없이 무의미하게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다. 평소와 다른 일이 벌어지는 날은 "특별한" 날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니, 그렇게 바라보려고 애쓴다고 해야 더 정확할까? 발견하듯 느껴진 날도  있고, 애써 그렇게 만들어가는 날도 있으니 둘 다 옳은 말이다. 중요한 건 그게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시작점만 다를 뿐 특별하다는 결론엔 변함이 없다.


너무 쉽게 망쳐버릴 수 있는 날을 "특별한 날"로 인식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무엇보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인다. 오늘 나의 경우 한 달 넘게 외면해 오던 수면 부족과 모임의 시스템 강화 측면을 생각할 수 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8시 무렵의 창밖 풍경이지만, 뭔가 더 찬란한 느낌을 받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책상 위에서 햇살을 받으며 나를 말없이 기다려주고 있던 책들과 노트, 랩탑과 메모지들이 참 고맙게 느껴졌다.


마치 이런 내 마음을 두드리듯 요 며칠 틈틈이 펼쳐서 다시 읽고 있는 책에서 멋진 문장을 만났다.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 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내일', 나중에', '네가 출세를 하게 되면', '나이가 들면 너도 알게 돼' 하며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고 살고 있다. 이런 모순된 태도는 참 기가 찰 일이다. 미래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이니 말이다.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구절이다. 늘 일을 그만두고 파리로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던 작가는 말한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나를 위한 공간은 지중해 어디에도 없다고.
- 김민철 <모든 요일의 기록> 중에서



현재를 온전히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 원하는 미래는 없다.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언젠가는 오지 않는다.


수많은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고 조금은 공감했지만, 그게 정확히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실제로 어떤 날은 엉망이지만, 어떤 날은 제법 좋았고, 어떤 날은 우울했지만, 어떤 날은 제법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분명 오늘은 별로지만, 더 나은 내일이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성공과 실패로 이야기하면 더 분명해질 것 같다.

어떤 때는 실패하지만, 어떤 때는 잘되기도 하니까,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 믿었다.

그건 완벽하게 틀린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성공은 미래의 어떤 시점에 주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은 내가 원하는 삶을 오늘, 지금 이 순간부터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다.


이전의 내가 생각하던 성공이나 행복이 막연했던 이유는 내가 스스로 선택한 능동적 시간의 결과물이 아니라, 어쩌다가 운 좋게 주어지는 행운처럼 수동적인 결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결과를 내가 알지 못하니 늘 불안하고 조급하고 막연했다.

그렇게 삶을 수동적으로 사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무언가에 휘둘리게 된다. 삶의 결과를 결정하는 주체가 자신이 아니때문이다. 관계휘둘리고, 돈에 휘둘리고, 그날그날의 크고 작은 사건에 휘둘린다. 나중에는 그런 외부의 자극에 끊임없이 반응하느라 지친 감정 자체에도 휘둘리게 된다.


지금 행복하라는 말, 오늘부터 성공하라는 말은 그래서 의미 있다.

그건 내 삶의 결과를 스스로 선택하는 능동적인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신은 '오늘'을 선물하고 나를 테스트한다.


테스트한다고 해서 나를 감시한다거나 내가 잘못된 행동을 벌주려 한다는 뜻이 아니다. 완전 반대다.

테스트할 수 있는 하루를 선물해 준 것이다. 오늘 하루를 통해 내가 진정한 삶의 주인임을 깨닫기를 바라고 있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 아침 늦잠 잔 것 때문에 타인을 원망하거나, 비난하거나, 나 자신을 심하게 자책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우리는 성숙하지 못한 많은 날들을 그런 수동적인 반응으로 대해왔을 때도, 신은 아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날과 변함없이 하루라는 선물을 주면서 말이다.


오늘을 최선을 다해 행복하고, 오늘 내가 바라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 내가 그토록 바라는 "행복"과 "성공"이라는 단어의 한 조각임을 안다. 이 하루하루의 조각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느냐에 따라 내 삶 전체가 더 행복해지고, 이미 그 자체로 성공이라는 사실을 느낀다. 이 사실에 이미 행복하고 감사하고 충만해진다.


마치 해외여행을 갈 때 집에서 출발하는 순간부터 이미 행복한 것처럼. 설령 여행지에서 짐이나 여권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비행기를 놓치거나, 길을 잃어버리더라도, 여행의 진짜 의미를 알고 있다면 행복할 수 있다. 그 상황이 여행을 더 특별한 여행으로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수동적인 태도로 사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들에 집중한다. 바꿀 수 없는 무언가 때문에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갑자기 차가 내 앞을 끼어들어서 순간 분노감에 휩싸이고,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상대방이 갑자기 내 앞에 끼어들어 사고 날 뻔 한 상황) 때문에 화가 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된 사람들은 다르다. 보다 능동적인 태도로 대응한다. 상대방이 갑자기 내 앞에 끼어든 상황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어쩔 수 없지만, 다행히 사고는 나지 않았고, 서로 놀랐지만, 자신의 감정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화가 나는 상황은 마찬가지지만, 화가 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적으로 안된다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내가 계속 화를 내봐야 결국 내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만 소모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내가 수동적으로 살고 있는지, 능동적으로 살고 있는지에 따라 내가 내 삶을 얼마나 지배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개인적을 필자는 현재 20% 정도 지배하고 있다고 느낀다.) 내 삶의 극히 일부의 시간만 '주인'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내 삶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내가 주인 자리를 무언가에 내어주었기 때문에 계속 그것에 휘둘리며 사는 것이다.


좋은 삶이란 내 삶에 더 많은 시간을 내가 온전한 주인으로 보내는 삶이다. 흔히 자기계발이라고 부르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가 거기에 있다고 믿는다. 조금 더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종교에서 추가하는 가치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기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나 불교에서 말하는 '집착(貪, 탐)'과도 같은 맥락이다. 내 마음의 주인 자리를 다른 무언가에게 내어주는 행위다.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것은 유일신(신과 연결된 본연의 나) 외에 다른 무엇에도 내 삶의 주인자리를 내어주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집착이나 욕심을 버리라는 것은 내 마음의 주인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본래의 내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치우라는 뜻일 것이다.


오늘은 신의 테스트이자, 선물이다.


테스트란 지금의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다.



간혹 우리가 생각하는 시험이란 평가하고 비교해서 혼나는 일쯤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건 교육방식의 문제일 뿐, 실제로 시험이나 테스트는 '자기 발견'의 기회, 즉 메타인지를 높여가는 과정일 뿐이다.

여담이지만, 똑같은 맥락에서 공부하는 것도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중하는 수동적인 친구들은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 반면 성적이 오르는 부류는 하나뿐이다.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시험을 볼 때마다 자신이 몰랐던 것들을 발견해서 새롭게 알아가는 친구들 말이다.


공부든, 사업이든, 인생이든,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과정은 "오늘(현재, 지금)"에서 시작된다.

스펜서 존슨의 <선물>이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듯 매 순간 현재(present)가 신의 선물(present)이다.


글을 쓰다 보니 2시간 가까이 글을 쓰며 사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오늘 2시간 늦게 하루를 시작한 덕분에, 이미 2배 더 특별한 하루를 보내기로 '선택'한다.

오늘의 경험 덕분에 내 삶을 지배하는 퍼센트가 21%로 늘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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