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 없이 걸어도 좋은 날
종종 이곳을 지날 때마다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빌딩들을 보며, 다들 참 열심히 산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요.
멀리서 보면 마치 아무도 없어 보이는 텅 빈 사무실처럼 보이기도 해서, 그냥 전등을 안 끄고 간 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골목으로 들어오니 아직 8시가 넘지 않은 저녁시간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이미 술에 취한 사람도 있고, 식당을 찾으며 돌아다니는 사람, 식사를 마치고 나온 사람, 회식자리에서 잠깐 나와 담배를 피우는 사람 등이 보이네요. 다들 저마다의 삶의 시간들을 보내며 오늘은 저처럼 이곳에 와있네요. 혼자 목적 없이 골목을 걷다 보니 조금은 낯선 이질감도 느껴집니다. 왠지 어딘가 들어가서 맥주를 한잔 하든, 국밥이라도 한 그릇 먹고 나와야만 할 것 같달까요.
그 사이에도 아주 가끔 이 근처에 온 적은 있지만, 딱히 이 시간에 이곳에 올 일은 없다 보니 15년의 세월을 건너 마치 먼 외국을 와있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그저 한 블록을 가로질러 종각 근처까지 왔는데, 이곳에서도 버스를 탈 수 있지만, 조금 더 걷고 싶어서 다시 처음 가려했던 버스정류장으로 돌아갑니다.
이번에는 왔던 골목이 아닌 다른 골목으로 말이죠.
'오, 좀 전에도 스타벅스가 있었는데, 여기 또 있네?'
'오, 여기 텐동은 한번 먹어볼 만하겠는데?'
'와, 여기 스시집은 진짜 장사 잘되는구나'
'예전에 좋아했던 찻집은 이제 없어졌나 보구나'
이런저런 생각들이 애쓰지 않아도 하나둘 흘러갑니다.
딱히 붙잡아 두려 하지도 않고, 굳이 비우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풍경도 생각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걸을 뿐입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한참을 걷다가 나중에 아내랑 와보면 좋을 것 같은 분위기 좋은 식당과 카페도 발견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같이 종로에 와본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언제한번 데이트하자고 해야겠습니다.
버스정류장에 와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금세 도착한 버스를 타고, 순식간에 강남까지 와버렸습니다. 버스 풍경보다 오늘 잠깐 마주한 골목의 풍경이 왠지 더 여운이 남아 있습니다. 걷는 동안 마주한 수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삶의 궤적들이 느껴진 것일까요? 아니면 내 삶의 한 부분이 유독 까맣게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잠시 골목을 걸었던 시간이 30분 정도 걸렸을까요? 책방에서 걸어온 시간을 다 합쳐도 1시간도 안되는 것 같은데, 그저 마음 닿는대로, 걸음 닿는대로 산책하니 한결 더 풍요로운 느낌입니다.
목적지까지 빨리 가는 것만이 삶의 목적은 아니듯이, 때론 산책하듯 마음의 여유를 가진 시간 자체가 오늘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네요. 아무런 특별한 일 없는 일상의 짧은 순간들도 내 삶의 일부임을 느낍니다.
아무 일 없이 그냥 걸어도 좋은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