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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대원 Jun 07. 2024

#_우린 왜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해석할까?

인식의 방향과 차원에 대하여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제가 책을 열심히 읽고 글을 쓰는 이유 중에 어쩌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수준을 더 높이고 싶다는 열망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현상을 보고도 다른 결론을 말하곤 합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결론이지만, 우리가 자라온 환경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무의식 속에서는 모두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존재합니다. 엄연히 착각이죠.

나는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한 것 이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상황에서 그 입장이 직접 되어보지 않는 한 쉽게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오늘 그 어려움에 대해 2가지 관점에서 글로 풀어보려 합니다.


우선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는 과정을 '인식'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인식 (認識) :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


사전적으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네요.

조금 더 범위를 확장해서 설명하자면 사물이나 사건, 사람 등을 분별하고 판단하여서 아는 것이겠죠.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할 때는 항상 2가지 조건이 존재합니다.


첫 번째는 관찰자의 관점입니다.

밖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조금 흐린데요. 이런 날 하늘색은 구름색인 흰색일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흰색처럼 보이는 회색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하는 파란색과 하얀색을 섞으면 나오는 하늘색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하늘색은 비 온 다음날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하늘이 보일 때 발견할 수 있죠.

게다가 낮에 하늘색이 어떤 색이건 밤이 되면 하늘은 온통 검게 바뀝니다.  

즉, 내가 하늘을 보는 시간에 따라 하늘색은 달라집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사위가 하나 있다고 해볼게요.


같은 주사위를 어떤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 눈에는 4,5,6개의 점이 찍혀있는 면이 보일 것이고, 다른 사람 눈에는 1,2,3개의 점이 찍힌 면이 보일 수 있겠죠. (사진 참조)

관찰자의 관점에 따라 보이는 게 전혀 달라집니다.


같은 주사위를 보고 보이는 숫자의 합을 말하라고 했을 때,

15라고 말해도 참이고, 6이라고 말해도 참입니다. 서로 같은 걸 다르게 말하지만 둘 다 진실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의 관점에 따라 같은 것을 두고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내가 보이는 6이고 그것이 100% 옳기 때문에 6 이외에 다른 것을 말하는 사람은 틀렸다고 말할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관점에 따라 인식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되면 조금 더 높은 인식의 차원이 열리게 됩니다.


두 번째 인식의 조건이 바로 관찰자의 수준(인식의 차원)입니다.

2차원의 수준에서는 점, 선, 면만 존재하므로 입체로 된 주사위를 인식할 수 없습니다.

주사위가 입체로 구성되어 있어서 6개의 면에 1부터 6까지의 숫자가 점으로 표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앞서 보았던 주사위에 대한 설명을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어렸을 때 니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다녔는데,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단순한 차원에서 거부감이 생긴 것이었고, 그런 사람의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니체를 읽고 나서 "신은 죽었다"는 말만큼 신앙적인 표현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의 인식의 차원이 높아지면서 "신은 죽었다"는 말과 "신은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말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니체는 스스로를 예수와 비교하기도 했었죠.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고 단면만 보면 오해만 불러올 수 있지만, 철학의 패러다임 자체를 송두리째 바꾼 위대한 철학자의 메시지는 그리 단편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죠.


얼마 전에 지인과 대화하다가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떤 책을 읽어보면 돈을 부자처럼 여유 있게 쓰라고 하고, 또 어떤 책에서는 돈을 아끼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말이죠.

제가 볼 때는 둘 다 맞는 말입니다. 단순히 2개만 비교하면 모순된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정육면체 같은 것이죠.


예를 들어 <바빌론 부자들의 돈 버는 지혜>라는 책과 기타 수많은 부자들의 조언에 따르면 부자가 되려면  반드시 수입의 10% 이상은 저축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머지 중에 일부는 자신을 위해서 아낌없이 투자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내가 세상을 경험할 있도록 시간과 돈을 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불필요하게 나가는 지출하고 있는 돈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줄여야겠지요.


단순히 생각하면 내가 버는 돈은 그냥 2백만 원, 3백만 원 이런 식으로 한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꼭 지출해야 하는 돈, 나에게 투자할 수 있는 돈, 저축해야 하는 돈, 불필요하게 나가는 돈 등 여러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런 구분만 할 수 있다면 돈에 대해서 하는 다양한 활용방식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식의 차원이라는 게 존재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사람은 착해야 합니다. 옳은 말이죠.

그러면 모든 순간에 완벽하게 착하기만 해야 할까요?

내가 호구가 되고, 내 자존감을 무너뜨려서까지 착해야 하는 걸까요?

그건 분명 아닐 겁니다.

애당초 "착해야 한다"는 명제가 사실 잘못되었죠.

착한 것은 의무나 노력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얻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온전하고 당당하고 있으면, 타인에게도 너그럽고 어진 존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과적으로는 착하고 어진 존재이지만, 그 과정에서는 때론 무섭도록 집요하기도 하고, 칼같이 냉정하기도 할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만의 분명한 삶의 기준이 서있기 때문이죠. 그 결과 대부분의 관계에서 착할 수 있는 것일 테니까요.


물론 이 역시 하나의 관점일 뿐입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옳은 말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인식의 차원에 따라 우리가 믿는 것들,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이나 생각도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판단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할지라도 현재 내가 인식하는 차원 이상을 경험해보지 않는 이상 내가 머문 상태가 늘 옳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 대부분의 갈등이 존재하는 이유일 겁니다.


우리의 생각이 틀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옳지만,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 역시 옳을 수 있습니다.

그걸 이해하려면 더 높은 차원의 인식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새벽부터 책을 읽고, 강의안을 만들고,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더 많이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타인을 더 많이 이해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런 앎에 대한 노력과 열정이 분명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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