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 까주는 여자

리치에서 새우까지

by 란이랑

료는 뜬금없이 나에게 리치가 열댓 개 든 그릇을 내밀었다.


"これ、剥いてくれる?” "까줘"


”なんて?” "뭐?"


"俺、剥いて食べるのめんどくさい。自分では剥いて食べない” ”나, 이렇게 까먹는 거 귀찮아서 혼자서는 잘 안 먹어"


"ランが剥いてくれたら愛されてると感じる” ”란쨩이 까서 주면 사랑받는 느낌이랄까"


어이가 없었다. 다 큰 놈이 껍질을 까달라고 진지하게 부탁을 한다. 손이 없니 발이 없니? 그래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랑받는 느낌이라니,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건가.


장소는 기억나지 않지만 뷔페에서 데이트 중이었다. 내 일본인 동갑내기 남자친구 료는 흔히 말하는 Type A로 항상 굉장히 자신감이 넘치는 상남자스타일이었다. 내가 약간은 시덥잖은 얼굴로 리치를 까기 시작하니 왕자가 된 기분이 든다며 실실 웃는다. 그 모습이 어이없으면서도 귀여워서 '그래 뭐 날마다 하는 일도 아닌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생각을 고쳐먹고 하나씩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까서 주는 대로 속없이 족족 알맹이만 홀라당 자기 입으로 가져간다. 한 15개 정도 까준 것 같다. 좋아하는데 귀찮아서 안 까먹는다라, 너도 참 희한한 사람이다.


그때는 나름 콩깍지가 쓰인 상태여서 기분 좋게 까줬던 것 같은데, 나중에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왜 내가 그걸 순순하게 까줬지?라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왕자대접이라, 그럼 나는 하녀인가? 너가 왕자면 나는 공주가 되고싶은데.


료는 일본인들 중에서도 굉장히 가부장적인 마인드를 가진 편이었는데, 여자가 남편/남자친구를 위해서 음식을 준비해서 내놓고 그런 것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던 것 같다. 여자친구가 자기를 위해서 요리를 해놓고 짜잔 하고 내놓는 그런 영화장면에 대한 환상, 자기 여자친구도 그런 전통적인 성역할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사귀는 동안도 그런 말을 넌지시 많이 했던 것 같다. 란이 이걸 했으면 좋겠어, 저걸 저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둥 말이다. 데이트를 나갈 때도 항상 예쁘게 꾸미고 나오기를 바라고, 자기가 하는 말에 말대꾸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했다.


20대 중반의 나도 역시 A 타입으로 당차고 자신감 가득한 나름 현대 여성인데, 자꾸 "음 뭐라고?" 하는 포인트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료가 원하는 여인상은 나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6개월쯤 지났을까, 료가 갑자기 "너랑 나랑은 성격이 잘 안 맞는 것 같아." 하며 이별을 고해왔다. 리치를 까주는 것만으로는 역시 부족했나 보다. 보통 그런 이별의 말을 들으면 충격을 받을 것도 같은데, 전혀 대미지가 없었다. 아 그래, 너랑 나랑은 안 맞는 게 맞는 것 같아 하고 금방 수긍했다. 나도 알게 모르게 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주 쿨하게 우리는 "헤어졌다." "헤어지자"라고 하고 나서 내가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때까지 거의 1년을 더 만났다. 서로 미래 (결혼)는 없다고 벌써 단념하고 나니 오히려 쿨하게 만나서 매번 재밌게 데이트하고 쿨하게 헤어졌다.


남편은 새우를 좋아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새우 살을 좋아한다. 반면 발이 많이 달린 생물체들, 거미, 문어, 오징어, 벌레, 새우, 들에 기겁을 하는데, 병명으로는 아라크노포비아라고 하는데 거미에 대한 공포라기보다는 발이 여러 개 달린 그 어떤 모습도 징그러워한다. 새우는 좋아하는데 새우 발을 무서워한다니,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그래서 음식 속에 새우가 통째로 들어가 있으면 보려고도 먹으려도 하지 않는다. 가끔 순두부찌개를 먹으러 가면 그 속에 들어있는 통새우를 나에게 넘겨준다. 먹으라고 넘겨줄 때도 있지만 까 주라는 뜻이다. 이럴 때면 남편의 새우다리공포증에 아내라는 원더우먼이 나서줘야 한다. 열심히 까서 주면 잘도 받아먹는다. 남편에게 새우를 까 줄 때는 료에게 리치를 까 줄 때의 의아함이나 굴복감은 없다. 남편이 새우를 좋아하는데 못 먹는 게 안쓰러워서 왜 내가 다 큰 어른한테 이걸 까줘야 하지 라는 거부감보다는 먹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이게 사랑의 힘인가? 나는 역시 료를 사랑하지는 않았나 보다. 好きと愛してるの間の関係 (좋아해 와 사랑해의 사이 같은 관계) 였다고나 할까.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척척 새우를 까는 내가 자랑스럽고, 공포감에 낙지와 오징어를 먹지 않는 남편덕에 맛있는 낙지볶음과 오징어 반찬은 다 내 몫이다. 이런 게 상호 보완이지 ㅎㅎ


료와 결혼을 했다면 지금 새우 대신 리치를 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료와 결혼을 했다면 날마다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여보~식사하세요~~~ 하고 있겠지. 일본 드라마에 나오는 참하고 고분고분한 아내 역할을 어금니 씹으며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하다. 새우나 리치 둘 다 자주 먹는 음식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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