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진 | 이안수
출판사 | 남해의봄날
<빨간머리 앤>이라는 이야기책이 있어. 애니메이션으로도 볼 수 있고. 주인공 앤이 꼭 지수를 닮았어. 실수도 잘 하지만 상상력도 뛰어나고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앤이 이렇게 말했어. "정말 행복한 나날이란 항상 멋지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날이 아니라 진주알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며 자잘한 기쁨이 이어지는 날"이라고. p97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마치 앤이 다른 집으로 입양을 가는 것처럼 아쉬웠습니다. (...) 그렇지만 앤의 말을 되새기는 것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습니다.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p100
그는 나이고 나는 그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는 '모두 같다'는 단 하나의 원칙만 두고 상대를 바라봅니다. 사람을 바라볼 때 과거의 성취나 실패를 현재의 시선에 반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처음 만나는 분이라도 마치 친구처럼 친밀하게 느껴집니다. 돈이 많고 명성과 직위가 높은 사람에게도 움츠러들 필요가 없으며 남들이 비루하게 여기는 사람도 존엄과 존경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이고 나는 그입니다. p101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콩을 삶아 메주를 발효실에 들여 두면 이제 좋은 메주가 만들어지는 것은 하늘과 땅의 기운과 자연의 신묘한 조화에 맡겨둘 일입니다. 좋은 된장과 간장의 시작이 될 좋은 메주를 만들기 위해 지금 사람이 할 일은 그저 조용히 기다리는 것, 즉 '뜸을 들이는 시간'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맛 좋은 밥을 짓는 일이나, 좋은 장을 담그는 일이나, 좋은 사람이 되는 일, 그 이치가 크게 다를까 싶습니다. 밥을 지을때면 더 이상 가열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고, 장을 만들 때도 사람의 품을 들이지 않는 시간, 즉 그냥 내버려 두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것이지요. 뜸을 들이지 않은 밥은 설익고, 뜸을 들이지 않은 장은 소금물에 불과합니다.
사람에게도 '뜸이 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 즉, 짧게는 막연히 먼 산을 보거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 눈을 감는 시간 등 길게는 며칠, 혹은 몇 주 동안 일상으로부터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허락되어야 합니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바로 '뜸이 드는 시간'인 겁니다.
저는 미생물 농사꾼 우태영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좋은 장의 비결을 생각하고, 좋은 장은 '뜸'을 들이는 그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 조급함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치를 상기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좀 기다려주는 것, 그 마음이 필요합니다. 어린 자녀를 채근하는 것은 밥이 되어가고 있는 솥의 뚜껑을 계속 열어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향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월의 향기'입니다.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고, 세월이 흐른다 해도 계속 채근 받은 존재에게는 그런 향기가 풍기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기 것을 나누어 주려했고, 설령 그것을 되갚으려고 하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갚아라!" 말했습니다.
p 217
이제는 하나도 불편하지 않은 게, 사람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는 거예요. 모두 각자의 생각이 있고 다 자유가 있잖아요.
p 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