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씩 더듬듯 끌어올린다. 흐릿하게 번진 잉크 자국처럼, 분명 존재했지만 또렷하게 붙잡히지 않는 장면들이 머릿속 어딘가에서 천천히 스며 나온다. 나는 그 기억 속에서, 끝없이 가라앉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숨을 삼킬 때마다 눅눅한 공기가 목 안쪽까지 들러붙었고, 세상은 마치 소리를 잃은 듯 고요했지만 동시에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견디다 못한 어둠이 결국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흘려보낸, 그 첫 번째 비였을까. 아니면, 이미 수없이 무너지고 찢겨진 끝에, 더는 남은 것이 없어 마지막으로 쏟아져 내린, 그 처절한 비였을까.
하늘은 그날, 유난히 낮게 깔려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검푸른 구름들은 서로를 짓눌러가며 뒤엉켜 있었고, 그 틈 사이로 새어 나온 빛조차 숨을 죽인 채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공기는 눅눅하고 무거워서, 들이마실 때마다 폐 깊숙이까지 젖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참고 있던 무언가가 끊어지듯,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기듯—한 방울이 떨어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는지, 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비는 점점 굵어졌고, 이내 세상을 집어삼킬 듯 퍼부어댔다. 바닥을 때리는 소리는 단순한 물방울의 낙하가 아니라,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은 점점 더 거칠어졌고, 마치 누군가 문을 열어달라며 미친 듯이 두드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빗물은 거리의 먼지를 씻어내렸지만, 동시에 더 깊고 짙은 냄새를 끌어올렸다. 젖은 아스팔트, 눅눅한 흙, 썩어가는 나뭇잎,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오래된 감정의 냄새까지.
나는 그 속에서 서 있었다. 피할 생각도,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비는 내 어깨를, 머리칼을, 눈꺼풀을 무겁게 짓눌렀고, 결국 내 시야마저 흐릿하게 만들어버렸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 순간에도 나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나는 처음이었을까, 아니면 마지막이었을까.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애초에 그런 구분 자체가 의미 없었을지도 모른다.
비는 시작과 끝을 동시에 품고 있었고,
그 안에서 나는 단지 흘러가는 한 조각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비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빗소리는 더 이상 평온함이 아니라 균열의 전조처럼 들리고, 빗방울은 단순한 물이 아니라 무언가 무너져 내린 잔해처럼 느껴진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누군가의 울음처럼 집요하게 이어지고, 젖어드는 공기는 여전히 숨을 막히게 한다. 그래서 나는 안다.
이유를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더라도, 감각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제, 비는 질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