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트레스 아카이브(Stress Archive)
(Stress Archive)
05
자처하지 않은 역할
나에게는 대학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온 친구 L이 있다. 그는 뭐든지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일뿐만이 아니라 제 사람들에겐 매사에 잘 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예쁜 마음가짐이 모두가 L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도 L을 사랑하지 않는 건 가장 힘든 일 중 하나였다.
그런 L이 퇴근 시간 언저리쯤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깜짝 놀란 나는 하던 일을 급하게 마무리하곤 서둘러 퇴근을 했다. 그는 야근이 잦은 나를 배려해 단 한 번도 그 시간에 전화를 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L의 목소리는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눈물을 토해내는 L의 하소연은 놀랍게도 대학 동기 K와 관련이 있었다. K는 대학 시절에도 자신의 불운한 상황을 설명하며 부정적인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당시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던 나로선 그의 부정적인 말들이 도저히 감당이 되질 않아 거리를 둔 바가 있었다. 그러나 나와 달리 L은 천성이 착해 제 사람들을 끔찍이 여겼기 때문에 그런 K의 하소연을 종종 들어주며 지금까지 친분을 이어오고 있었다.
그러다 졸업을 앞둔 K가 L이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 인턴으로 가게 되었다. 그 회사는 무능력한 상사로 인해 L이 매일같이 야근에 시달리게 하는 곳이었는데, 평소 강단 있는 L조차 버거워하던 회사를 K가 잘 버틸 수 없을 거라는 건 너무도 쉽게 예측이 되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K는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매일같이 L에게 하소연을 퍼부어댔고, 그 하소연들은 과도한 업무량과 상사로 인해 지칠 때로 지친 L에게 크나큰 독이 되었다. 결국 L은 심한 우울증으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결심했고, 그마저도 완전히 제 마음을 치유해 주지 못하자 내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L의 사연은 비단 그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모두가 한 번쯤 겪은 적이 있을 테고, 나 또한 그랬다. 단 한 번도 자처한 적이 없었지만 제 호의를 이용하는 누군가로 인해 저도 모르는 사이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맡은 것이다.
부정적인 상황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때마다 우울하거나 분노하는 등 부정적인 감정들이 온몸을 지배하곤 하는데, 사람은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대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말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지나치게 문장에 섞는 경우이다. 대개 사람은 공감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타인의 감정에 쉽사리 영향을 받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를 빙자한 말이 오고 가는 상황에 부정적인 감정이 섞여 있다면 저도 모르는 사이 그것에 전염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호의를 가지고 참여한 대화에서 저도 모르는 사이 '감정 쓰레기통'의 역할을 맡아선 제 것이 아님에도 그 고통을 고스란히 떠맡게 된다. 안타까운 점은 한 번 '감정 쓰레기통'의 역할을 떠맡게 되면 그 역할이 주는 괴로움의 무게를 잘 알기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 힘듦을 털어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끝내 스스로 괴로워하는 길을 택해선 오랜 기간 피폐한 일상에 침체되고 만다.
고민거리나 힘든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잘 해결하는가'이다. 여기서 '잘'이라는 단어는 '자신의 감정을 건강하게 회복했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면 '그 과정에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내재되어 있었는가'를 뜻한다. 두 가지가 원만한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면 어느 누군가는 피해를 보게 된다.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가 또 다른 고통을 낳게 되는 것이다. 특히 타인에 대한 배려는 쉽게 놓치고 마는 부분이므로 특별히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나의 말에 지나친 감정이 섞이진 않았는지 반드시 생각해야 하며, 나와의 대화에 선뜻 참여해 준 상대방이 나에 대한 좋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절대 상대방의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선 자신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상대방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니 어차피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각종 부정적인 감정들이 야기되고 마는 형국이라면, 나를 위한 마음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항상 기억하며 건강한 해소 과정을 만들어가는 것을 한 번쯤 생각해 봐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