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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Jun 20. 2022

인간을 정의하려는 어리석은 과업

인간의 '본질'은 다층적 세계에 놓임에 있다

1. "인간은 OO적 동물이다"라는 간명하지만 별 의미 없는 정의들이 있다. 사실 엄밀한 정의라기 보다는 발화자가 강조하고 싶은 면만을 부각시키는 수사에 가깝다. (호모 루덴스라고 하는데 놀 시간이 없어. 호모 파베르? 뭐 고장나면 눈물을 머금고 바로 수리기사님을 부르지. 먼산.)


2. 인간이 특별히 잘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아가 지구상에서 가장 파괴적인 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인간을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정의'해 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지 잠시 생각해 봤다. 어설프게 짜낸 답은 이렇다.


"인간은 타 생명체에 비해 가장 다면적인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다." (<- 그렇다. 철저히 인간 입장에서의 정의다.)


3. 이 정의의 핵심은 '어떤 존재'에서 '어떤'에 해당하는 한정어(qualifier)를 '가장 다면적인 요인의 영향을 받는'이라고 기술한 데 있다. 시쳇말로 인간은 별것에 다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것이다. 세상 오만 것들에 기뻐하고 슬퍼하고 들뜨고 화내고 삐지고 상처받는다. 게다가 그 '세상'을 끊임없이 확장하려고 한다. 그게 자신을 나아가 지구의 비인간 존재들을 위협하고 있음을 잘 모르고(라고 쓰고 '무시하고'라고 읽는다.)


4. 타 생물체들에 비해 인간종의 역사는 턱없이 짧다. 하지만 두뇌용량의 증가 및 문화의 축적 등으로 인해 다양한 사회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세계를 생산하고, 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지은 죄가 많으면 발을 뻗고 잘 수 없듯이(?), 지어놓은 세계가 많으니 그 세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좀 단순하게 살았으면 좋았을 걸. 이미 너무 늦었다. 


5. 이제 인간은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와 동적이며 은밀하게 조우하며 살아간다. 먼저 다른 생물종과 마찬가지로 물리적 생태계의 영향을 받는다. 거기에 사회적 관계에서 받는 영향이 비교적 크다. 기억하는 존재, 예상하는 존재로 현재 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 모두에 영향을 받는다. 물리적 세계가 아닌 상징계, 대표적으로 언어와 소리, 몸짓과 이미지로 구성된 세계에서 허우적댄다. 무엇보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로 인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궁리하고 갈등한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동영상 플랫폼, 게임과 메타버스 세계의 급격한 확장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영향의 범위와 깊이를 극한까지 밀어부치고 있다. (몸도 마음도 늙어가는 것인지 굳이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살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자주 든다.)


Photo by Cristian Newman on Unsplash


6. 인간으로서 나의 사고와 행동은 생물학적 종으로서 인간이 진화해 온 역사에 기반한다. 사회문화적 영역을 살펴보면 한국사회의 특유한 역사가, 서울이라는 시공간이, 학교로 대표되는 교육체제가, 부모형제를 비롯하여 인생길에서 만난 적지 않은 이들이 나의 뇌와 마음을 만들어 왔다. 읽고 본 책과 영화 등에서, 여행에서 보고 느낀 바에서, 미디어를 통해 접한 역사적 사건에서, 다양한 신화와 이야기의 세계에서, 여러 미디어의 메시지에서 끊임없이 영향받고 있다. 


7. 이렇게 우리 모두는 각자가 태어나서 자란 환경에 따라 수많은 요인들의 영향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받고 있다. 즉, 우리는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광범위한 맥락 하에 놓인 존재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시간축, 동시대 다른 존재들과의 교류, 밤하늘을 바라보고 그 너머를 응시하는 우주적 상상력의 영향을 모두 받는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페이스북에서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 중 하나는 <James Webb Space Telescope (JWST) & Astronomical Discoveries>이다. 포스트 몇 개만 봐도 내가 사뭇 신비한 존재라고 생각되기도, 우주 끝자락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8. 요즘엔 뜸해졌지만 예전에는 언어를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잦았다. "다른 생물은 못 하는데 인간은 이렇게 복잡한 언어란 걸 쓰거든!"이라는 식의 설명이다. 이후 다양한 동식물들의 소통체계에 대한 연구로 이런 식의 수사는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언어와 같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정의의 중심에 놓는 경우가 많다. 


9. 하지만 난 무언가 할 수 있음을 특성으로 갖는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시공간과 다양한 세계 하에 놓여지는 존재로 인간을 보려 한다.  굳이 인간을 '정의'해보라 한다면 "누구보다 많은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 존재" 즉, "가장 광범위한 맥락 하에 놓이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10.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영향을 받는다'를 인간의 본질로 생각하는 것은 교육에서도 무거운 함의를 갖는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나는 할 수 있다'가 아니라 '우리는 영향을 받는다'라고 진술하고 싶다. 주어를 바꾸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은 "내가 할 수 있음"이 아닌 "나는 할 수 없음"을 중심에 놓는 교육이다. 이에 관해서는 예전에 이런 쪽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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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음'의 교육과정 상상하기


교육과정의 교육목표 혹은 평가기준은 대개 "~할 수 있다"로 표현된다. 소위 "can-do statements"라고 불리는 문장들이다. 영어과라면 "친숙한 일상생활 주제에 관하여 영어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와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이같은 목표는 교육을 "무언가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상태'로 변화시키는 일"로 정의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진술이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음'의 위세에 철저히 외면당한 교육의 다른 목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할 수 없음'을 깊고 처절히 깨닫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먼저 나 혼자 할 수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역사와 사회, 성장과 보살핌을 기억한다면 홀로 할 수 있는 일은 도무지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사회문화적으로, 정치경제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며,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할 수 없음"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부족한 나, 할 수 없는 나, 무지한 나, 언제나 타자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나를 깨닫는 일. 나의 능력, 나의 '할 수 있음'의 대부분은 자신의 노력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각성. 이들이야말로 '할 수 있음' 만큼이나 소중한 목표이다. 


근대 이후의 교육은 오로지 '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깃발을 흔들었고, 이것은 '할 수 없는' 이들을 체제 바깥으로 내몰았다. 다양성을 찬양하는 듯 하면서도 개인을 우상시하며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했다. 성취한 이들에게 모든 영광이 돌아갔고 나머지는 도태된 '루저'들로 전락했다. 지능(IQ)과 일련의 표준화 검사들은 인간 능력의 도량형이 되어 '불량품'을 효율적으로 솎아냈다. 전쟁과 빈부격차, 환경파괴의 '외적인 참혹함'은 한 쪽으로 치우친 교육과 사회화가 빚어낸 어그러진 능력주의라는 '내적인 참혹함'과 거울 이미지를 이루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를 지나며 주류 심리학은 인간을 줄세우고 벨커브(Bell curve)에 가두었다. 그 옆에는 '할 수 있음'이라는 가치를 향해 앞만 보고 돌진하는 이들을 길러내고자 한 교육이 있었다. 교육은 '할 수 있는'이들을 대량생산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렇게 길러진 '할 수 있는' 이들 덕분에 이 사회에는 점점 더 할 수 없는 일들이 쌓여간다. 할 수 있는 영역은 자본과 권력을 중심축으로 형성되었고, 그에 복무하는 능력만이 '핵심역량'으로 인정되는 경향은 심화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진실을 감추는 역량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련된 오만으로 무장한 '할 수 있는' 이들이 끝없이 만들어내는 고통을 '할 수 없는 이들'이라 규정된 이들이 오롯이 받아 안아야 하는 시대는 비극적이다. 그렇기에 "Can-do statements"를 넘어서 "Can't do statements"를 상상한다. 할 수 있는 이들의 오만함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자로서의 겸손함을 키워내는 교육, '할 수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 아니 이미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일들에 주목하는 사회를 소망한다.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거짓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할 수 있음의 교육학'을 넘어 '할 수 없음의 교육학'을 상상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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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나는 아침부터 어떤 요인의 기묘한 영향을 받았길래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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