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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Aug 22. 2022

'심심한 사과' 등을 둘러싼 '소란'(?) 단평

다양성(diversity)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흘'과 '심심한 사과'


1. 이미 많은 분들이 좋은 이야기를 해 주셨으니 저는 비슷한 이야기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해 볼까 합니다. 


2. 오래 전부터 '다양성(diversity)'을 하나의 교과목으로 구성해 보자는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저는 현재 한국사회 교육에서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주제를 '다양성'이라는 키워드로 묶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양성' 교과를 개설하여 한 학기 동안 우리 안에, 우리 사회에, 또 다양한 담론 영역에 펼쳐져 있는, 아니 많은 경우 은폐된 다양성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면 어떨까 합니다. 물론 개별 교과 내에서 다양성이 다뤄지지만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교과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제안입니다. 


3. 내용은 언어 다양성, 문화 다양성, 젠더 다양성, 생태 다양성, 연령 다양성, 신체 다양성, 신경 다양성, 인종 다양성, 종교 다양성, 섭식 다양성 등으로 구성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한국 교육과정 디자인 역사상 가장 다양한 교과구성위원회가 맡으면 어떨까 생각하고요. 


4. '다양성'을 하나의 교과로 묶자는 주장에 대한 우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교과 전반에 스며들어야 할 주제를 하나의 교과로 묶어내는 일은 다양성의 가치를 오히려 훼손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지금 이 시기에 하나의 교과, 혹은 대안적 교과로서 '다양성'의 현실과 가치, 또 지향을 모든 시민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하다면 초등, 중등, 고등에서 나선형으로 구성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생각해도 김칫국 오집니다. ㅎㅎ)



5.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저는 '사흘', '무운', '심심한 사과' 등을 둘러싼 소란(?)이 전통적 의미의 문해력 하락이나 그 원인의 일부라고 주장되는 한자교육 실패의 틀로 논의되는 것은 제가 위에서 언급한 다양성의 가치와 충돌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심한'을 모르는 사람이 당연히 있을 수 있고, '심심한'을 정중한 사과문에 쓰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언어가 변해가면서 단순히 사전의 등재항목(entry)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언중의 머릿속이 변화한다는 것,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회집단 사이에 오해와 갈등의 여지가 생긴다는 것은 주어진 사실입니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6. 그렇다면 우리가 더 고민해야 할 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다양성과 혼종성에 대한 무지입니다. 평상시 잘 쓰지 않는 '무지'라는 단어를 쓴 것은 위에서 언급한 사실에 근거해 볼 때 우리 모두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무지를 안고 살아가고 있고, 누구도 완벽하게 모든 세대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지 못 합니다. 우리가 일면 무지하다는 것 또한 주어진 사실입니다. 


7. "'심심한'을 모르면 찾아보면 된다"는 말은 명제 자체로 옳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특정한 의사소통의 장 안에 들어갔을 때 갖는 효과는 명제가 갖는 의미론적 의미를 넘어섭니다. '찾아보면 된다'는 말은 "내가 '심심한'을 쓴 것을 이해해야 할 책임은 너에게 있다"라는 말로 번역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왜 '심심한'을 쓰냐? 사과가 장난이냐?"는 식의 대응은 자신과 다른 문화와 담론의 세계를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체화된 언어와 인지의 패턴이 있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불평불만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나에게 말하라는 말은 실상 절대군주의 언명입니다. 나 외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짐은 곧 국가다'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는 말입니다. 


8. '심심한'의 사용에 분노하는 시민이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를 쓰는 이주노동자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공존할 수 있을까요? ''심심한'도 모르는 한심한 것들'이라는 진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새로운 세대의 언어와 문화에서 배우며 성장할 수 있을까요? 아니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신이 속한 학교와 직장, 다양한 공동체에서 열린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9.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는 혼종성을 망각하고, 타자의 세계를 납작하게 눌러버리며, 단 한 마디로 상대를 제압하거나 무시하려는 사람들이 다양성이 생존이 된 이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솔직히 의문스럽습니다. 


10.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지난 학기 <권력, 다양성, 사회정의의 사회언어학(Sociolinguistics of power, diversity, and social justice)>이라는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설익은 시도였지만 여러 학생들과 함께 진지한 고민을 나누었습니다. 이번 학기에는 <응용언어학과 영어교육을 재개념화하기: 나의 탈식민 해방일지>라는 수업을 통해 학술장의 영미중심주의, 엘리트주의, 영어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등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11. 마지막으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서 엄기호 선생님이 말하신 리터러시의 또 다른 정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리터러시란 응답할 줄 아는 역량이다."


흔히 리터러시의 한 축으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정합니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과업을 이루기 위해 정보를 모으고, 이해하고, 종합하고, 생산하고, 전달하는 능력이지요. 쉽게 말하면 제대로 알고 표현하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위의 정의는 리터러시의 본령이 '응답'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에 따르면 자신의 언어를 갖는 것은 리터러시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반응에 대해 내가 어떻게 응답하느냐죠. 응답이라는 행위는 상호적입니다. 상대의 언어와 세계를 상상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12. 우리는 여전히 '바벨탑'으로서의 리터러시에 익숙합니다. 저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이고요. 하지만 리터러시의 본령은 언제나 '다리'가 되는 데 있습니다. 응답하는 능력으로서의 리터러시, 타인의 세계에 가 닿기 위한 노력으로서의 리터러시, 윤리적 책무에 괄호치지 않는 리터러시, 서로서로 다리가 되어 더 좋은 삶으로 초대하는 리터러시를 기대해 봅니다. 


덧. 휘리릭 써내려 간, 구멍이 숭숭 뚫린 글이지만 이 주제로 많은 분들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좋겠습니다.


#삶을위한리터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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