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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Oct 15. 2022

가르치는 일을 택한다는 것은 아마

부끄럽지만 나누고 싶은 것에 대하여 계속 이야기하는 걸 뜻하는 것 아닐까


1. 간만에 3시간 연수를 맡았다. 선생님들과 만나면서 '교사교육자'라는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가 가르칠 것은 별로 없다. 괜한 겸양의 말이 아니라 내가 선생님들께 더 많이 배워야 할 처지이다. 그래서 늘 죄송하다. 어쩌면 그냥 생각과 경험을 나누는 자리일 뿐인데 '강사'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게 버거울 때가 있다. 


2. 조금 다른 측면에서 교사와 교수가 공저를 하거나 학회 등에서 함께 발표를 할 때 교사의 이름이 먼저 나오고 교수의 이름이 뒤에 나오는 경우를 좀처럼 보지 못 했다. 별것 아닐 수 있지만 이름의 표기에서 지식장의 권력과 위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최근 교사연수를 보면 역량있는 선생님들이 강사로 나서는 경우가 증가하는 듯하다.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3. 번역기 활용에 대한 태도와 실천이 몇 해 사이에 정말 많이 바뀌었다. 3-4년 전까지만 해도 번역기를 활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면, 최근 연수와 교육에서는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로 논의의 축이 넘어왔다. 나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1) 번역기 사용이 영어 능숙도에 의해 형성되는 교실 내의 위계를 어떻게 전복할 수 있을지, (2) 영어학습을 '목표어 연습과 활용'이 아닌 'L1, L2, 다양한 시청각 자료, AI 자원 등의 다양한 의미자원의 배치 역량'으로 재개념화할 수 있는 방안에는 무엇이 있을지, (3) 궁극적으로 '언어능력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해 논의한다. 



4. 여전히 평가는 어렵다. 번역기 및 말뭉치 도구, 다양한 디지털 자원을 활용하는 수업에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지에 대한 명확한 그림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역에서도 새로운 관점과 실천이 등장하고 있다. 관련 연수를 들어보고 싶은데 자격도 안 되고 시간도 나질 않는다. (오늘 우연히 "다음 한국어 문장을 영작했을 때 N번째로 올 단어는?"과 같은 문제를 접했는데 말문이 막혔다. ㅠㅠ)


5. 사회문화이론과 액티비티 이론을 공부하면서 분석과 이해의 단위를 '개인'에서 '개인+문화적 도구'로, 나아가 특정한 목표 하에서 '개인+문화적 도구+규범+소속 공동체+분업'의 역동적 구성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와 세상을 보기 시작한 후 교육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다. 각자의 두뇌와 몸을 가지고 지식과 경험을 몸에 쌓는 교육과 개인과 도구, 사회적 자원, 제도 등이 엮이는 양태는 동전의 양면처럼 엮여 있다. 물적 조건과 문화적 토양을 빼고 개인의 심리와 성장을 말할 수 없고, 개인의 변화를 빼고 사회의 변화를 논의할 수도 없다. 


6. "하지만 우리가 심리학적 분석의 단위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름들은 사뭇 다르다: (소비에트 심리학 특히 액티비티 이론(activity theory)에서 다루는) 행동, 동작, 활동 등 대신에 (미국에서는) 스크립트, 표상, 프레임, 그리고 전략 등이 사용된다. 미국 심리학의 분석단위(the unit of analysis)는 매우 확고하게 개인에 머물러 있다. 개인이 처한 환경은 단지 해당 개인에 접근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소비에트 학자들은 우리에게 사고(thinking)란 활동(activity)의 시스템들 간의 상호작용, 다시 말해 "정신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조직화된 단위들"이 이루는 시스템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표현해 준다는 점을 말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 Michael Cole. (1981). Wertsch, J. V. 편저 The concept of activity in Soviet psychology. (Sharpe) 서문 중에서


7. 심리학의 기본 단위를 개인과 그 개인의 정신작용의 세부 요소들로 설정하는 경향 (미국 심리학계) VS 심리학의 기본 단위를 개인의 사고를 조건짓고 가능하게 하는 일련의 물적, 문화적, 제도적, 시스템적 조건 및 구체적 활동으로 설정하는 경향 (소비에트 심리학계) --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사뭇 크다.


Michael Cole은 소비에트 심리학의 주요 전통 중 하나인 액티비티 이론의 가정을 받아들일 경우 '기본 심리학'과 '응용 심리학'의 경계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인간의 행동 자체가 분석의 대상이 된다면 기본 심리학의 결과들을 선별하고 종합하여 인간행동에 적용하는 일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액티비티 자체를 분석하면 액티비티에 대한 함의는 자동으로 도출되기에 응용의 과정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8. 나의 예전 CV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의 학술 작업은 응용 언어학, TESOL, 다국어 쓰기 연구를 인간의 발달과 상호의존성에 대한 역사적, 계보적 분석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나는 또한 알기와 실천하기, 가르치기와 연구하기,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의 전통적인 이분법을 극복하는데 기여하기를 희망한다. (My scholarly work aims to reenvision applied linguistics, TESOL, and multilingual writing research as a historical and genealogical analysis of human development and interdependence. I also hope to contribute to overcoming the traditional dichotomy between knowing and doing, teaching and researching, and the individual and community.)"


9. 내일 수업시간에는 내 이야기를 풀어놓게 되었다. 자문화기술지를 다루는 수업에서 나의 자문화기술지적 내러티브를 소개하기로 한 것이다. 대학원에서 초안을 잡고 후에 수정 보강하여 낸 논문인데 솔직히 잘 쓴 논문은 아니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이 언어교육을 재정의하며 실천한 궤적이 담겨 있는 글이다. 부끄럽지만 나누고 싶은 글이랄까. 어쩌면 '선생'이라는 직업을 갖게 되면서 피할 수 없게 된 일인 것 같다. 부끄럽지만 나누고 싶은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10. 그러고 보니 오늘은 강의하느라 석양과 마주하지 못 했다. 그래도 친구분들이 올려주신 멋진 하늘 덕에 마음이 훈훈하다. 세 시간 강의로 녹초가 되었지만 밤을 뚫고 산책을 다녀왔고, 내일은 좋아하는 선생님들과 좋아하는 선생님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다 그만두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가도 땅에 발 딛고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고 다짐하게 된다. 변덕이 죽 끓듯 하지만 리듬을 잘 살리면 맛있는 죽이 되기도 한다.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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