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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Nov 08. 2022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시간의 축과 선택의 축을 뒤집어 다른 '서사'를 구축하다

(스포라고 보기엔 그저 응용언어학 공부하는 사람의 뻘소리입니다만, '스포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클릭하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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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가지 사고 실험을 해 보자. "Hero's journey"에 두 가지를 더한다. 우선 "Hero"에 "Everyone"을 대입한다. 그리고 "Journey"에 "Everything"을 대입한다. 맥락은? 모든 가능한 세계로 확장한다. 그 모든 것을 겪어낸 이들이 지금-여기에 평범한 인간으로 존재한다면? 


2. 언어를 규칙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구조로 보는 관점과 선택의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체계로 보는 관점은 사뭇 다르다. 전통적 구조주의 언어학이 전자의 대표격이라면 체계기능언어학은 후자의 대표주자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촘스키 언어학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언어연구의 대표 분야는 통사론(syntax)이었고, 이는 시간의 축 위에 흘러가는 통합체(syntagm)의 질서에 대한 탐구였다. 이에 비해 체계기능언어학은 언어연구에 있어 계열체(paradigm)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3. 넓은 의미의 계열체는 한 자리에 올 수 있는 다양한 언어표현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필자가 세 단어로 된 "I love you."라는 문장을 만든다고 할 때, "I", "love", "you"가 각각 계열체이며, 특정한 맥락 하에서 각각의 자리에 올 수 있는 계열체의 개수는 셀 수 없이 많다. 


4. 하지만 현실의 인간은 시간 위에서 발화하기에 한 자리에 올 수 있는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화음을 쌓듯 동시에 많은 단어들을 발화할 수 있는 화자, 그렇게 일시에 발화된 모든 단어들을 이해할 수 있는 청자는 SF의 훌륭한 소재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SF에 문외한인지라 이미 나와 있는데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5. "나는 지금 페이스북에 쪽글을 쓰고 있다."는 문장에서 '나'의 자리에 올 수 있는 명사는 무한에 가깝다. '강아지'도 올 수 있고, '막대기'도 올 수 있고, '너'도 올 수 있고, 책상'도 올 수 있고, '시금치'도 올 수 있다. '지금'의 자리에 올 수 있는 부사 또한 그렇다. '페이스북에' 자리에는? '쪽글'의 자리에는? 그렇다면 이들 모두를 엮어낼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는? 그 경우에 수가 다음 문장의 경우의 수와 만났을 때는? 


6. 이렇듯 선택의 가능성은 무한히 많지만 우리는 하나의 단어를 선택하고 그 다음의 단어를 선택한다. 그 선택의 집합은 하나의 문장(삶의 매듭)을 이루고, 그것이 모여 문단(삶의 국면들)을 이루며, 그것이 모여 글(삶)을 이룬다. 인생이 글이라면 우리는 하나의 아주 긴 글을 쓸 수 있을 뿐이다. 마침표를 찍지 못 하고 끝나는 글 말이다. 



7. 하나의 단어가 선택될 때 무한에 가까운 선택지가 '버려지듯이' 지금 이 삶에 '갇혀' 있을때 무한히 많은 우주의 무한히 많은 자신은 소거된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계열체의 자리에 멀티버스를 대입하고, '소거된' 모든 경우를 소환한다. 당신은 모든 곳에 모든 것으로 동시에 존재한다.


8. 결국 당신은 무한히 많은 삶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들이 엮여 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무한의 계열체를 경험하는 여정에서 돌아온 당신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어떤 문장을 쓰게 될까? 여전히 "I love you."라고 말하게 될까? 멀티버스의 모든 자신을 그리고 타자들을 만나고 돌아온 지금도 똑같은 발화를 하게 될까? 


8. 아니다 질문이 틀렸다. 무한의 여정,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의 경험에서 돌아온 자에게 '똑같은 발화'란 존재할 수 없다. 기표는 "I", "love", "you"로 같지만 "I" 자리에 올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한 뒤 고르는 "I"는 이전의 "I"가 아니다. love도, you도 이전의 love와 이전의 you가 아니다. 


9. 한 학생이 이 영화와 <어라이벌>을 엮어서 이야기해도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너무 잘 이해가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h10sJv3IacQ


10.Dan Kwan과 Daniel Scheinert는 가로축(시간 위에서 흘러가는 내러티브의 축)을 세로축(한 순간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건들의 축)으로 홱 돌려버린다. 현실태가 아닌 가능태의 이야기를 두 시간 내내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축을 다시 90도 돌려 가로축으로 만든다. 


11. 언어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담화는 현실의 일반 동사들(do, am doing, did...)로 구성되고 중간중간 서법 조동사(modal auxiliaries)라 가끔 등장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걸 완전히 뒤집어 버린다. 주요한 동사들은 죄다 may, may have been, must be, had to, would have been, should have been, might, might have been이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현재형 동사가 등장한다. 


12. 그렇게 수많은 modalities를 경험하고 난 뒤에 접하는 현재형 동사는 어떤 의미일까? 지금, 여기, 당신은 무엇일까? 혹은 무엇이 아닐까?


13. 다시 <Arrival> 마지막 부분으로 돌아온다. 


"If you could see your whole life from start to finish, would you change things?"

14. 어쩔 수 없이 시간축 위에서 허덕거리는 나는 비틀즈를 찾아 듣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YBcdt6DsLQA



===


아래는 영화를 보기 전 끄적인 '헛소리'입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그리고 대화의 희열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는 바 전혀 없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없는, 순수히 제목만 보고 하는 뻘소리입니다.)



인간의 의지나 감정에 아랑곳않고

시간은 '흘러간다'.


몸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여러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텍스트(text)가 컨텍스트(con-text)에서 

탈출할 수 없듯이

인간은 시공간 밖으로 

탈출할 수 없다. 


물리적 시간은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인간은 몸을 가지고 이동하기에 

공간의 단절 혹은 통합을 경험하지는 못 한다.


하지만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다.


시간을 돌이킬 수 없고

공간'들'을 점유할 수 없지만

지각하고 움직이고 기록하고 사유하며

뇌를 변화시킴으로써

지나온 시공간을 '몸에 새긴다'.


시공간은 

인간의 뇌+몸에 기억된다. 


그간 지나온 모든 계절이,

삶을 경유하며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읽고 본 책과 영화가

우리 안에 있다.

아니, 우리 자신이 되었다. 


물론 기억을 불러내는(retrieve) 데도,

아니 그 구성 요소들을 다시 소환하고(re-member)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으는(re-collect)데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찰나의 시간을 접어둔다면

우리는 모든 곳에 모든 것으로 한꺼번에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존재할 수 있다.


아니, 

이 말은 거짓이다.


우리는 

모든 곳에 모든 것으로 

일순간에, 한꺼번에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철저히

우리가 살아온 삶의 궤적에 의해 

제한된 시공간만을 '점유'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될 수도,

모든 곳에 있을 수도 없다. 


그런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 

인간은 다른 이들의 경험을 동경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탐험한다.


문학으로, 

영화로,

미술과 음악으로,

영상으로,

춤으로, 원예로, 

동료 동물들과 관계 맺음으로

다른 세계를 넘나든다.


나는

그런 넘나듦의 정점 중 하나가 

'깊고 넓은 대화'라고 생각한다. 


다른 지식과 경험,

감수성과 관점을 가진 이와 

대면하는 일.


그의 우주에서 가능한 

수많은 시공간, 역할, 감정, 생각들이 

나의 우주와 만나는 일. 


깊은 대화 속에서 우리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와 

가장 가까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대화에 완전히 몰입하는 순간,

카페의 다른 손님들이 사라지고

백그라운드의 음악이 희미해지며,

내가 말하는지 상대가 말하는지 알 수 없는

바로 그 순간,


나는 

그의 세계로 순식간에 이동하고


그 또한

나의 시공간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세계가 교차하면서

끝없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한없이 커지고

또 한없이 작아진다. 


나는 있기도 하고 또 없기도 하다. 


이게 바로 

'대화의 희열'이 뜻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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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본론이다. 


영화보러 가고 싶은데

시간이 나질 않는다. 


이게 사는 건가.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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