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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Jan 02. 2023

외국어外國語는 외체어外體語

하지만 논문은 당신 자신의 글입니다

대학원 학술적 글쓰기 첫 시간이 끝나고 한 학생이 다가왔다.


"이거 참 고민이네요."

"아 어떤?"

"제가 영어로 논문을 쓸 일은 없는데요."

"아... 수강할까 말까 고민이 된다는 말씀이군요."

"네. 저는 생각은 글로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네."

"그래서 매일 글을 쓰고 있어요. 글쓰기 강좌에 등록해서 서평 쓰는 법도 배우고요."

"아 정말 열심히 하시네요."

"네. 그런데 우리말로 쓰는 건 제가 딱 제 글을 쓴다는 생각이 드는데, 영어 논문을 쓰는 건 다른 사람들 글을 모델로 삼는 글이라..."

"좀 다르죠?"

"네. 쓰긴 쓰는데 진짜 제가 쓰는 게 아닌 것 같달까요. 남의 글의 종합이잖아요."

"아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는데, 결국 영어논문도 자기 글이예요."

"그런가요?"

"그렇죠. 초반에는 다른 사람들 글에 영향을 많이 받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의 글입니다."

"그렇군요."

"어떤 글이든 타인의 도움 없이 쓸 수는 없죠. 개인사를 쓴다 해도 타인이 전혀 등장하지 않을 수는 없고요. 쓰는 일 자체가 누군가에게 빚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 그렇죠."

"개인사를 쓰면 자기 삶을 재료로 자기 이야기를 하지만 논문의 경우에는 타인의 생각과 주장에 기대어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차이가 있죠. 그렇다 해도 자기 자신의 글이라고 생각할 때 훨씬 더 좋은 논문이 나와요. 이건 영어든 한국어든 상관이 없고요. 수업에서 관련된 이야기를 종종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자세한 건 학기 지나면서 말씀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시고, 다음 주에 뵐 수 있으면 뵙죠."

"예."


다음 주에 그 학생을 만나게 될까? 설령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논문은 자기 자신의 글'이라는 말의 뜻을 서너 달 만에 온전히 이해시킬 수 있을까? 수강생이 많아져 고민이 되다가도, 나보다 더 큰 고민을 안고 있는 학생들을 만나면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은 게 사실이다. 수다쟁이 선생 같으니라고.


다음 시간, 다시 그 학생을 만났으면 좋겠다. 


(학기 말)


다행히(?) 이 대화를 나눈 학생은 수업을 끝까지 들었다. 일을 하면서도 열성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기말에는 '영어 논문쓰기를 통해 한국어 글쓰기 제반에 대해서까지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영어 글쓰기에서 글쓰기 전반으로 고민을 확장할 수 있어 좋았다는 말에 밥값은 한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Photo by Etienne Girardet on Unsplash


외국어로 글을 쓰게 되면 종종 자신을 잃는다. 선생이랍시고 이 자리에 있는 나 또한 여전히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으니 초심자들은 더더욱 그럴 공산이 크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실제 외국어는 자기 몸과의 거리를 전제로 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체화되지 않은 개념, 언어와 연관된 사회문화적 경험의 부재, 부자연스런 얼굴 근육, 말과 온전히 협응하지 못하는 제스처, 웃어야 할 타이밍을 놓치는 '바보같은' 자신을 목격하는 일까지. 자신의 외국어 발화를 녹화해서 다시 볼 때의 생경함은 몸과 말의 거리를 생생히 증언한다. 


그런 면에서 외국어外國語는 근본적으로 외체어外體語다. 다른 나라의 말 이전에 내 몸 밖의 말이다. 몸에 새겨져 있지 않은 언어로 삶과 생각, 감정과 의견을 말하는 게 어려운 건 당연하다. 나아가 자기 삶의 의미가 아닌 원어민 수준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문법과 작문교육은 '외체성'을 심화시킨다. 구체적인 내 경험과 관점이 아닌 추상화된 '그들'의 문화와 생각으로, 나의 의미가 아닌 정확성이라는 기준으로 글을 만드는 법을 익힌다. 배우면 배울수록 말과 몸이 멀어지는 상황을 경험하는 일이 기쁘고 반가울 리 없다. 


외국어교육의 근본 문제 중 하나는 표준, 시험, 스펙 등을 추구하면서 나의 몸과 학습하는 언어가 더 멀어지는 데 있다. 체화된 리터러시(embodied literacy)를 추구하기 보다는 상품화된 리터러시(commodified literacy)를 습득하는 데 온 힘을 쏟는 관행이다. 배우면 배울수록 자본은 늘어가지만 영혼은 탈진한다. 


이처럼 궁극적으로 외국어교육의 문제는 '내 몸이 아닌 것으로 내 영혼을 표현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 대한 성찰과 '몸과 기호의 분리 혹은 기호로부터 소외된 몸'을 극복하기 위한 궁리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살필 수 있다. 


그렇다면 쓰기교육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표현의 정확성이 아니라 의미의 명료함에서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이 둘은 떨어져 있지 않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명징한 의미를 열망해야 한다. 명징한 의미에 이르기 위해서는 쓰는 노동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외국어교육/영작문 프로그램은 '맞게 쓰는 법'에 방점을 찍는다. 규범(convention)이 수업을 지배한다. 하지만 그러한 규범이 의미의 생산을 방해한다면 무슨 소용일까? 의미에 복무하지 않는 문법과 구조에 어떤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새로운 학기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며 이 점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영어가 '외체어'가 아니라 '내 몸의 언어'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2017년 글에 'embodied literacy'와 'commodified literacy' 부분을 추가)


#삶을위한리터러시 #영어로논문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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