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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추천작, 나의 문어 선생님

by 가이아

나의 문어 선생님, My Octopus Teacher (2020)


좋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짝도 추천을 받았다고 해서 틀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봤다. 다큐에 온전히 몰입하긴 참 오랜만이다.


My Octopus Teacher (IMDB)

https://www.imdb.com/title/tt12888462/


My_Octopus_Teacher.jpg


짧지 않은 시간 길냥이들과 친하게 지내 왔지만 동물과 깊은 연대를 이룬 적은 없다. 그저 동물이 좋고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정도이지, 그들의 삶을 온전히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용기를 지니진 못했다. 그런 면에서 난 겁쟁이다.


바닷속에서 거의 한 해를 문어와 함께 보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어떤 감정이 돋아나기 시작할까?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될까? 인간과 문어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문어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게 가능할까? 문어는 애초에 바다에 속하지 않은 인간을 벗삼아 살아가게 될까?


오래 전 연구방법론을 배우면서 관찰 과제를 수행한 일이 있었다. 과제는 단순했다.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 하나를 택해 한 시간 동안 최대한 집중해서 관찰하고 거기에서 드러나는 행동 및 상호작용 패턴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나는 도서관의 대출 데스크를 관찰 대상으로 삼았다. 대학 도서관 1층에는 두 명의 도서관 직원이 대출을 담당하고 있었다. 남성과 여성으로 판단되는 두 사람이 분주하게 도서 반납 및 대출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아무런 사건도 발생할 것 같지 않은, 어쩌면 재미없기 그지없는 공간이었다.


십여 분 쯤 지나자 어떤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성은 높은 스툴에 앉아 있었다. 자주 서가 쪽을 힐끔거렸는데, 책을 낑낑거리고 들고 오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곤 했다. 그는 스툴에서 내려와 서서 사람들을 기다렸다. 자기 앞에 책이 쌓이기 전에 준비를 하려는 요량이었다. 눈인사의 성립은 남성직원의 행동을 유발했다.


좀더 지켜보면서 알게 된 사실은 남성은 왼손잡이, 여성은 오른손잡이라는 사실이었다. 책을 스캔할 때 주로 쓰는 손이 확연히 달랐다. 둘은 좀처럼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 유독 많은 책을 대출해야 할 경우 여성이 '나한테도 좀 줘'라면서 스캔을 나누어 담당했다. 대출이 끝나면 남성은 여성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깍듯이 건넸다. 느낌상 둘은 잘 아는 사이 같았지만 꽤나 예의바른 사이이기도 했다.


박사과정 혹은 젊은 교수로 보이는 사람이 여행용 캐리어에 책을 잔뜩 가져와서 반납하는 순간이 특히 흥미로웠다. 스툴에 앉아 있던 두 직원 모두가 일어서서 조금 긴장한 듯 작업을 준비했는데, 반납자가 고개를 숙여 책을 꺼내어 데스크에 올려놓는 동안 여성직원이 한숨을 쉬었다. 남성 직원은 그 직원을 바라보며 웃음을 보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저런 사람 꼭 있지. 엄청 빌려가서 안보고 반납하는 타입. 에휴 한참 걸리겠네."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서고 쪽에 가까이 앉은 남성 직원이 사람들의 동선을 유심히 살피는 타입이었다면 여성직원은 자기에게 일이 생기기 전까지 차분하게 독서를 하는 타입이었다. 둘다 맡은 일에 충실한 직원이었지만 주의를 기울이는 패턴이 굉장히 달랐다. 속으로 '나는 남성직원과 비슷하게 일할 거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조금 웃긴 순간도 있었다. 서고 쪽에서 십여 권의 책을 쌓아들고 오는 사람을 보고 남성직원이 일어나 맞을 준비를 하는데, 그 학생은 남성직원을 지나쳐 여성직원 앞에 책을 내려놓았다. 남성 직원의 얼굴에 얼핏 스치는 허탈함에 '너무 열심히 하지 마세요'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의외로 대출하는 사람들의 성량 차이가 컸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흔히 말하는 'small talk'를 시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조용히 대출만 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상호작용 패턴이 사람마다 각각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공간이지만 사람들은 세밀한 감각으로 시야를 바꾸고, 손을 움직이고, 자리를 고쳐앉고, 말을 건네고,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그런 곳이 되어버리지만, 인간과 데스크와 책과 스캐너가 말과 제스처, 스캔 소리와 전산처리가 얽히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볼 수도 있는 곳이었다.


별것 아닌 과제였지만 느낀 점이 많았다. 교수님이 왜 이런 과제를 부과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가 아니라 "자세히 보아야 존재한다. 오래 보아야 발생한다. 모든 것이 엮여있다."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굳게 믿게 된 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공간은 없다"는 것이었다.


My Octopus Teacher (2020) Trailer

https://www.youtube.com/watch?v=3s0LTDhqe5A


글이 조금 돌아왔다. 다큐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자꾸만 눈앞이 뿌예졌다. 흔히 말하는 '감동'과는 조금 다른 결의 감정이 스몄다. 아마도 문어와 Craig Foster의 유대가 너무 많은 것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건 우정이자 사랑이고, 호기심이자 두려움이며, 연대이자 장벽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거대한 바다에 속한 이들의 관계이기에 만남과 헤어짐이 분리되지 않았다. 그게 위안이자 슬픔이었다.


"What she taught me was to feel... that you're part of this place, not a visitor. That's a huge difference."


Craig는 문어와 오랜 시간 함께 있음으로 '방문자'가 아닌 '생태계의 일부'라는 자격을 얻었다. 아니, 그렇게 여겼다. 문어에게는 어땠을까? 그는 Craig를 온전히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걸까? 분명 그랬을 것 같지만 다 알 수는 없다. 알 수 없지만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벌어진 한 해였다. 이해할 수 있건 없건 그들은 함께했고, 서로의 존재를 지각했고, 같은 시공간을 점하면서 온전히 함께 존재했다.


덧. 천연해에서 문어의 수명은 고작 평균 3년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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