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누가 그런 걸 공부해요?

프레이리와 비판교육학에 대한 단상 몇

by 가이아

문득 박사과정 진학을 준비하던 시절, 한 후배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그는 나에게 무엇을 공부할 거냐고 물었고 나는 사회문화이론과 비판교육학(critical pedagogy)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바로 날아든 한 마디.


"비판교육학이요? 요즘에 누가 그런 걸 공부해요?"


별로 친분이 깊지도 않았던 그의 퉁명스런 답은 충격으로 남았다.


딱 맞는 비유는 아니겠지만 이런 느낌이었달까?


"마르크스요? 요즘에 누가 그런 걸 공부해요?"

"셰익스피어요? 요즘 누가 그런 걸 공부해요?"

"플라톤이요? 요즘 누가 그런 걸 공부해요?"


이후 그는 박사과정을 거쳐 한 대학에서 일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제 좀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프레이리를 공부하는 사람은 많다.

나 또한 여전히 프레이리를 읽는다.

세월이 갈수록 더 많은 것들을 배운다.


'구식'이라고 폄하할 이유는 없다.

누군가가 '구식'이 되는 건

해당 인물 때문이 아니라

그의 시대와 사상을

온전히 해석하고 받아안지 못하는

우리 자신 때문이다.


덧. 프레이리에 대해 썼던 쪽글 몇 개를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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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없는 두려움은 있을 수 있고 그 때문에 우리가 황폐해지고 무력해질 수는 있지만, 두려움 없는 용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두려움을 제한하고 굴복시키며 통제하는 것이 우리의 인간성임을 "말해" 줍니다."


파울로 프레이리. <프레이리의 교사론> 교육문화연구회 옮김. 아침이슬. p.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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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은 우리의 양심과 함께 합니다.


1. "갈등이 없으면 삶의 존엄성이 손상됩니다. 투쟁과 갈등이 없는 삶 또는 인간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갈등은 우리의 양심과 함께 합니다. 갈등을 부정하는 것은 생생하고 사회적인 경험의 현실적인 측면을 대부분 무시하는 것입니다. 갈등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 파울로 프레이리


2. 비판교육학(critical pedagogy)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읽어가며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학생들은 현실을 비교적 정확히 인식하고 있고 불만도 많다. 거의 모든 학생이 현실을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흥미로운 것은 변화의 당위에 대한 긍정과 갈등과 투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동시에 드러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투박하게 요약하자면 '변화가 필요하지만 갈등이 심해지는 건 피해야 한다' 정도가 되겠다.


3. 첫 인용구에 드러나듯이 프레이리는 갈등을 대면하는 행위를 삶의 선택지 중 하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엄성의 문제로 본다. 양심의 동반자라 칭한다. 세상을 경험하고 의식화가 진행되고 나면 갈등을 알게 된다기 보다는 갈등을 직시하는 가운데 존엄과 양심이 회복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게 갈등은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윤리적 삶의 지표다.


4. 프레이리가 말하는 '의식화'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며 거기에 존재하는 갈등과 희망을 받아안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학습량과 비례하지 않는다. 헨리 지루는 "해방적인 지식을 거부하는 이들은 오히려 지식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알면 알수록 껄끄러운 일들을 멀리하고, 지식을 해방의 도구보다는 축적의 수단으로 쓰는 이들이 많아진다. 프레이리와 지루의 말을 더하면 알면 알수록 존엄은 스러지고 양심은 잊혀진다.


5. 비판교육학에서의 '갈등'이 주변 사람들과의 불화와 같지는 않다. 물론 정당과 노조활동가, 사회운동가, 시민단체 활동가 등은 직접적인 갈등상황을 피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학생들과 비판교육학을 논의할 때 나는 '주어진 내러티브'의 위험성을 이야기하곤 한다. 다시 지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살아온 문화의 담론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이른바 자기가 생산한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담론은 교사와 학생이 구현하고 생산하는 복잡한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형식들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많은 쟁점들은 이 관심사를 중심으로 비판교육학 속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교사는 지성인이다>, 211쪽)


6. 지루의 말 중에서 핵심은 '그들이 어떻게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의미를 만들고 공유하고 때로는 강요하며 살아간다. 사회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장 잘 하는 일이 의미생산인 것이다. 그런데 갈등없는 삶에서 이 의미는 그저 부여된다. 앎이든 삶이든 저항없이 순항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삶은 자기를 인식하지 못한다. 비바람을 맞고 무르팍이 깨지기 전에는 몸의 존재를 망각한 채 살아간다. 암묵적으로 만들어낸 의미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살아지는 대로 사는' 상황이 계속된다.


7. 학교 현장에서의 비판교육학은 지배적 서사에 대한 온갖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지식을 쌓음과 동시에 그에 대해 의심하는 습속을 키우는 일이 필요하다. 누가 규율을 제정하는가? 누가 상식을 정의하는가? 누가 나의 생각을, 나아가 우리의 생각을 만드는가? 김성우는 왜 나에게 이토록 많은 질문을 던지는가?


8. 비판교육학 수업을 앞두고 갈등에 대해 끄적여 보았다. 갈등에 취약한 사람으로서 갈등을 끌어안는 사상에 대해 논의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갈등이 삶의 필연적 조건임을 깨닫고 그 복판에 뛰어들었음에도 희망과 사랑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눌 때면 언제나 마음이 차오른다. 비록 한 주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학생들이 삶의 서사의 작동방식을, 생각의 연원을, 갈등과 저항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이제 수업 준비를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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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힘은 압제자로부터 나올 수 없다. 해방의 힘은 압제당하는 이들의 약함에서만 나올 수 있다.



"This, then, is the great humanistic and historical task of the oppressed: to liberate themselves and their oppressors as well. The oppressors, who oppress, exploit, and rape by virtue of their power, cannot find in this power the strength to liberate either the oppressed or themselves. Only power that springs from the weakness of the oppressed will be sufficiently strong to free both." - Paulo Freire, <Pedagogy of the Oppressed (50th Anniversary Edition)> p.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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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읽기는 항상 글 읽기에 선행한다. 글 읽기는 계속해서 세계 읽기를 내포한다. 내가 예전에 제안했던 것처럼, 글에서 세계로 이어지는 운동은 늘 일어난다. 구어도 세계 읽기로부터 흘러나온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순히 세계 읽기뿐만 아니라 쓰기와 다시 쓰기, 다시 말해 글을 의식적으로 실천적인 활동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글 읽기에 선행한다. 내가 보기에 문해 교육 과정의 중심에는 바로 이와 같은 역동적인 운동이 있다. 이 때문에 문해 교육 프로그램에서 활용하는 단어는 민중의 '문자 세계'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 이처럼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읽기를 통해(이 일이 문해 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지든 아니면 정치 참여나 조직화 과정에서 이루어지든) 안토니오 그람시가 말한 '대항 헤게모니'가 구축된다. 요컨대 읽기란 항상 비판적 인식이자 비판적이해, 그리고 읽은 것에 대한 다시 읽기과정인 것이다. Freire & Macedo, 1987:7-8


프레이리는 '읽기'에 대한 개념을 확장할 뿐만이 아니라 읽기에 필요한 텍스트, 과정, 행위 자체를 확장하고 있다. 프레이리는 또한 인간의 역사 자체가 세계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문자 형태로 기록했음을 상기시킨다. 즉 활자화된 단어를 읽기 전에 이야기가 있었으며 이야기가 있기 전에 행동, 행위, 실천이 있었다는 것이다. 프레이리에게 읽기란 세계-의식-실천-이론-세계 읽기-글 읽기-맥락-텍스트 사이의 관게를 이해하는 인식론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Freire, 1994:166). 그래서 프레이리에게 성인 문해 교육은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과정이 아니라 현실 속의 숨은 관계를 비판적으로 읽어 내고 변화시켜 나가는 복합적 과정이다(Giesel, 1999)."


<프레이리 선생님 어떻게 수업할까요> 7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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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렉트는 여기에 19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새로운 문해(New Literacy Studies)' 담론을 참조한다. '새로운 문해' 담론은 전통적인 문해를 기능적이고 보편화된 틀을 전제로 한다는 측면을 비판하면서, 문해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닌,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문해, 비문해에 대한 구분, 문해수준과 역량에 대한 평가, 문해 교재와 쓰임새 모두 이데올로기적으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문해 담론은 문해 사건(literacy events)과 문해 실천(literacy practices)을 상황분석과 교육을 위한 중요한 내용으로 삼는다. 즉 단수의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문해(literacy)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복수의 문해 실천들(literacies)이 있다는 것이다. 문해교육이 이미 정리된 내용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해'가 학습자에게 의미를 가지며, 어떤 방법과 과정이 학습자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만들 수 이는지에 대한 것들 역시 학습자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일종의 문해에 대한 민속지적 연구(ethnographic research)로, 학습자들이 문해로부터 결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공동체 내에서 다른 문해와 수와 관련한 다른 실천에 참가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학습자들이 워크숍을 통해 문해와 관련된 자신의 문제를 탐색하고 질문을 통해 문해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중요시한다." <프레이리 선생님 어떻게 수업할까요> 139-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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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리는 '문화 창조자로서의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10개 정도의 상황으 나타내는 그림을 사용하고, 자연과 문화의 차이, 문화들 간의 차이, 문자 문화, 문화의 민주와, 읽고 쓴다는 것, 의사를 교환한다는 것, 노동•학습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게 한다. 프레이리가 제시했던 10개의 상황 토론 주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1. 세계 안에, 세계와 더불어 있는 인간, 자연과 문화

그림 2. 자연에 의해 매개된 대화, 대화를 나누는 존재

그림 3. 글을 모르는 사냥꾼

그림 4. 글을 아는 사냥꾼(문자문화)

그림 5. 사냥꾼과 고양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

그림 6. 인간은 일을 통해 자연의 물질을 변화시킨다

그림 7. 꽃병, 인간이 자연의 물질에 일을 가해 만든 생산물

그림 8. 시, 도해적 표현

그림 9. 행동의 제 양식, 문화의 차이

그림 10. 학습 중인 문화 서클--토론의 종합, 문화의 민주화

(Freire, 1981:86-106)"


<프레이리 선생님 어떻게 수업할까요> 50-51쪽


프레이리의 접근을 보며 떠오른 한 마디. "정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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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A는 20-30명 단위로 문해 그룹을 조직했고, 그 그룹이 이끌고 지원할 슈퍼바이저를 선출했다. 그리고 직접 수업을 진행할 문해 활동가(리터러시 워커)와 트레이너, 모니터 요원들을 두었다. 그리고 프레이리의 ‘생성어와 생성 주제’에 영향을 받아 생성적 조사(generative investigation)를 진행하고, 의미 있는 상황에 대한 능동적이고 집단적인 대화로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지식을 집합적으로 재생성했다(collective regeneration). 실제 수업은 토론-쓰기-읽기-쓰기-토론의 순환구조로 이루어졌다. 학습자들의 삶에서 의미 있는 주제에 대해 그룹 토론을 하고, 토론에서 여러 어휘들을 끄집어 내고, 이를 글로 써 보고 난 뒤 그것을 읽고, 다른 학생들의 단어와 문장들을 써 본다. 그러고 나서 또 새로운 주제를 논의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문법 구조나 음운 조합은 크게 강조하지 않았다. 이 과정을 통해 빈민 지역의 현실, 인종주의, 미디어 등의 주제들을 토론하면서 학습자들의 상식을 변화시켜 나갔다. MOVA는 시 정부와 사회운동을, 그리고 교육, 문화와 정치를 연결하는, 과거 MCP와 PNA의 전통을 다시 부활시킨 문해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프레이리 선생님 어떻게 수업할까요>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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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프레이리에게 영향을 준 세 권의 책>


비고츠키에게 큰 영감을 받은 학자 중에서 파울로 프레이리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영향을 받은 가장 중요한 책 세 권을 이야기하며 비고츠키의 <사고와 언어>를 언급합니다. 나머지 두 권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과 알베르 멤미의 <식민자와 피식민자> 입니다. (파울로 프레이리, 마일스 호튼 지음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아침이슬). 56쪽.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책 몇 권을 선정하라면 정말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어학과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만난 가장 중요한 저술로 <생각과 말>을 꼽는 데 주저함은 없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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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린 아픔의 시간보다 더 위험한 건 "내일을 무력화시키는 노스탤지어" - 파울로 프레이리


돌아봄(retrospection)은

돌봄(care) 속에서 온기를 얻고

돌아섬(U-turn)의 순간에 빛을 보게 되는 것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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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가 아닌 대화.


"세상과 인간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없다면 대화도 존재할 수 없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창조와 재창조의 행위는 사랑과 융합되지 않는다면 가능할 수 없다. 사랑은 대화의 주춧돌인 동시에 대화 자체이다. 따라서 사랑은 책임있는 주체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지배관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지배관계에서는 사랑의 병리적 현상이 나타난다. 지배자에게서는 사디즘, 피지배자에게서는 마조히즘이 엿보인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사랑의 행위가 그들의 대의, 즉 해방을 바라는 욕구에 더해져야 한다. 사랑이 깃든 이런 헌신은 대화라는 형태를 띤다. 사랑하려면 대담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사랑은 감상적 사랑일 수 없다. 자유의 행위로써 사랑이 조작의 구실거리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또 다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행위를 낳을 수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조건이 더해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억압적 상황을 없애야만 비로소 억압적 상황에서는 불가능했던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결국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와도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 파울로 프레이리. - 피터 맥라렌 저. 강주헌 옮김. <체 게바라, 파울로 프레이리. 혁명의 교육학> (아침이슬, 2008) 266-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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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은 우리의 양심과 함께 합니다."


갈등이 없으면 삶의 존엄성이 손상됩니다. 투쟁과 갈등이 없는 삶 또는 인간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갈등은 우리의 양심과 함께 합니다. 갈등을 부정하는 것은 생생하고 사회적인 경험의 현실적인 측면을 대부분 무시하는 것입니다. 갈등을 회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 파울로 프레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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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 만나든, 어떤 장소에서든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 합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삶과 세계관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바를 여과없이 이야기하면 진실의 효용은 땅에 떨어지고 말지요.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제 신념과 지식이 누군가에게 필요 없는 찌라시가 되어 험하게 구겨져 쓰레기통에 쳐박히길 원치 않습니다. 대화와 강의에 있어 "무엇"의 문제만큼이나 "어떻게"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적절한 수사의 사용'이 진실을 오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해보려다가 본질과 멀어져 허공에 헛발질을 하게 될 때가 있는 것이죠. 의도치 않게 참여한 특강 형태의 (독백에 가까운) 대화에서 일부 학부모가 가진 욕망과 제 생각의 충돌을 종종 경험합니다. 제가 정말 던지고 싶은 질문들과 학생들이 강좌에 대해 갖고 있는 암묵적 기대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거리가 있기 마련이죠.


아래 인용구는 이런 고민이 있을 때마다 찾게 되는 프레이리의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프레이리도 지금의 저에게 "이렇게 하면 돼"라는 정답을 주진 못합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원칙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겨 봅니다. 교육과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분리하는 순간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는 원칙 말입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교육내용을 역사적,사회적 맥락과 분리하지 않아요. 앞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저는 학생들에게 사회적 환경과 교육내용을 분리해서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생물을 공부하러 온 학생들에게 내용은 가르치지도 않고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생물은 가르치지 않고 현재 브라질 정치가 심각하다는 말만 한다면, 학생들은 제게 "선생님!우리는 생물을 공부하러 여기에 왔거든요!"라고 말하겠지요. 마찬가지로 역사,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고 생물만을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이때 저는 이런 질문을 하겠지요. 만고불변의 객관적인 생물학이란 없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생물교사나 물리교사가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학문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 학생들은 결국 생물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이 사회적 삶과 동떨어져 있찌 않다는 비판적 이해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바지요." (파울로 프레이리, 마이스 호톤 지음. 프락시스 옮김. 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2006). 아침이슬. 141-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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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사랑은 물론이고 가르치는 일에 포함된 과정에 대한 사랑도 개발해야 합니다. - 파울로 프레이리 <프레이리의 교사론> p. 41


나는 이 과정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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