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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May 21. 2022

쓰기교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리터러시의 특권을 넘어서는 리터러시를 위하여


1. 읽기와 쓰기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춤을 추는 사람은 몸으로 생각할 수 있고, 농사를 짓는 사람은 곡물과 자연을 통해 생각할 수 있다. 디자인을 하는 사람은 점, 선, 면을 통해 생각을 그리며, 운동을 하는 사람은 훈련과 몸의 감각을 통해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생각과 실천의 방식을 넘나들며 새로운 사유를 열어내는 것 또한 가능하다. 


2. 근본적으로 전통적 의미의 리터러시(읽고 쓰는 능력)를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역량이라 말하는 것은 구텐베르크 은하계가 만든 사회기술적 환경과 19세기 이후 산업과 교육의 '공모', 나아가 근대국가의 정치적 프로젝트를 망각한 이데올로기다. 글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평생 글을 읽고 쓴 사람임에도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기도 한다. 리터러시로 사람을 차등화하려는 시도에는 언제나 성찰하지 않는 권력의 폭력이 드리워져 있다. 


3. 그렇다고 이러한 사실을 인정함이 리터러시 교육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져도 된다는 결론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20세기 이후 공교육은 말 그대로 다양한 리터러시 교육에 다름 아니며, 소위 '멀티미디어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공적 커뮤니케이션의 대부분은 글을 통해 이루어진다. 동영상의 시대라고 하지만 문자를 통한 소통은 더욱 빈번하고(메신저와 개인과 기관의 웹사이트, 소셜미디어를 생각해 보라) 인문사회 및 과학기술의 미디어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문자이다. 


Photo by Yannick Pulver on Unsplash


4. 이것은 딜레마인가? 어찌 보면 그렇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 소위 '못 배운 사람들'이나 학력자본의 축적에 '실패'한 사람들을 리터러시의 바깥으로 몰아내고 '배운 사람들', '글 깨나 읽고 쓰는 사람들'을 권력의 중심부에 위치시키는 구조가 엄존한다. 리터러시를 강조할수록 기성의 권력에 힘을 더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리터러시의 부익부빈익빈을 가리키는 '마태효과'는 개인의 차원 뿐 아니라 사회계층과 구조적 차원에서도 작동한다. 


5. 하지만 이는 리터러시 교육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함을 말하기도 한다. 여러 지면을 통해 강조했듯이 여기에는 두 가지 과제가 있다. 하나는 리터러시의 지형을 수직적인 위계에서 수평적 다양성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고, 두 번째는 리터러시 자체를 '바벨탑을 쌓아 자신의 사회문화적 자본을 쌓는 개인의 일(individual enterprise)'에서 '다리를 놓아 세계를 연결하고 더 좋은 삶을 구축하는 공동체 프로젝트(communal project)'로 재개념화하는 일이다. 전자가 능력주의(meritocracy)로 대표된다면 후자를 명징하게 드러낼 개념어는 단번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후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비판리터러시 연구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6. 타학문의 지형과는 달리 비판 리터러시 연구critical literacy studies는 리터러시 연구의 변방에 있다. 권력의 문제를 언어를 둘러싼 제반 문제와 연결하는 작업이 “삐딱선을 타는” 사람의 일로 치부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류가 인정하든 안하든 권력은 편재한다. 중력과 전자기력, 약력과 강력이 우주에 충만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권력과 리터러시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은 “불만 가득한” 이의 반항이 아니라 언어를 기반으로 삼는 인간의 존재양식을 꿰뚫어 보기 위한 작업이다. 언어는 독립적일 수 없으며 힘의 관계로 엮인 인간들을 통해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7. 그렇기에 계속 물어야 한다. "나의 말글은 어떤 힘의 장場에서 효과를 거두고 있는가? 어떤 권력이 나의 말을 허용/불허하는가? 누구의 말이 순식간에 장을 점령하는가? 그런 '점령'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 권력을 어떻게 바꿔낼 수 있는가? 더 나아가 내 안에 있는 글읽기/글쓰기 권력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8. 점점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일이 늘어감을 느낀다. 비슷한 이야기를 변주하며 수년 째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남대 교양과정 개편에 맞물려 글쓰기 교육이 대폭 축소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잡감을 꺼내 보았다. 소위 '4차산업혁명과 메타버스의 시대'에 글쓰기의 중요성은 감소할 것인가? 혹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리터러시의 특권, 아니 '고급' 리터러시를 손쉽게 습득할 수 있는 계층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은 아닌가? 


https://youtu.be/pFiAoONlJh8


9.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글쓰기의 가치는 글을 쓰는 일이 "사고의 모드(a mode of thinking)"이자 그 결과물이라는 점에 있다. "Writing"은 글을 쓰고 있다는 뜻도 있지만 글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글쓰기는 과정과 결과를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활동이며 이는 다시 사고와 변증적 관계를 맺는다. 적어도 나에게 글쓰기는 사고의 가장 좋은 도구이자 사고 그 자체이다. 


10. 그렇다고 내가 느끼는 글쓰기의 가치를 모든 사람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는 춤으로, 누군가는 그림으로, 누군가는 말로, 누군가는 동식물과의 동행으로, 누군가는 나무를 심는 일로, 누군가는 음악으로, 누군가는 그저 오래 걷는 일로 사유하고 깊어지고 즐거워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11.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전통적 의미의 리터러시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할 이유는 없다. 글쓰기가 그리기나 춤추기, 농사짓기와 나무심기보다 우월할 이유는 도무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들이 공적 삶을 영위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생각이 분명 존재한다. 이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시민의 의무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리터러시보다 더 나은 공적 생각의 모드를 발명해내지 못했다. 이 또한 읽기쓰기를 중심에 두는 주장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공론장의 사고와 소통을 지탱하고 매개하는 미디어로서 춤이나 노래, 그림이나 걷기보다 글을 상정하는 것이 대책없는 똥고집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2.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시대의 변화를 좇아 글쓰기 교육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리터러시의 권력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며 다른 리터러시를 꿈꾸는 일이다. 바벨탑이 아닌 다리로서의 리터러시, 능력주의의 징표가 아닌 삶의 다양성과 역동성으로서의 리터러시 말이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 교육은 축소되고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고 강화되어야 한다. 


#삶을위한리터러시 #유튜브는책을집어삼킬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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