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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May 24. 2022

THE BEST, MY BEST, & OUR BEST

최고, 최선, 그리고 사회적 신뢰

"Your best is enough. Trust me." (네 선에서 최선을 다한 걸로 충분해. (이제) 날 믿어.) -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중 한 장면에서 울버린이 자비어에게 하는 말이다. 영화가 끝나고 이 대사가 머릿속에 한참이나 맴돌았다. (스포일러 없음)


이 사회는 최고(the best)에 목을 맨다. 올림픽에 나가면 금메달을 따야 하고, 제품을 만들면 당연히 세계 일류여야 한다. (에잇, 2등은 기억하지 않는 더러운 세상!) 노벨상 수상자와 '스티브 잡스'를 만들기 위해 뭘 해야 할지 집요하게 묻는다. 전교생의 석차를 복도에 붙여 두거나 임용고사 순위대로 좌석을 배정하는 야만적 행태는 진즉 사라졌지만 여전히 천재 하나가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는 주장이 이리 저리에서 튀어나온다. 뭐든 일단 잘하고 볼일이고, 잘하려면 제일 잘해야 한다. 나아가 가장 잘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온갖 편법과 인맥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런데 "Your best is enough."란다. 네가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 된단다. 정말 그런 걸까? 울버린과 자비어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다. 학생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이 말을 건넬 수 있을까? 한 치의 주저 없이 "최고(the best)"가 아니라 "최선(your best)"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최선을 다하는 개인은 공동체의 신뢰가 만들어 내는 것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뒤에 나오는 "Trust me."를 연결해 읽어야 한다. 즉,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말이 힘을 갖기 위해서는 그 말을 하는 사람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깊이 신뢰하는 사람 앞에서라면 최선을 다할 수 있고, 최고가 아니어도 충분하다. 나의 몸부림을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린 모두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거지. 안되면 말고, 뭐." "네가 할 수 있을 만큼만 해. 그걸로 충분하거든." "최선을 다하는 네가 내게는 우주, 아니 멀티버스에서 최고야! 세계 1위 따위는 꺼지라고 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닐까? 


사실 여기에는 작은 비밀이 숨어 있다. 최고(the best)를 강요받는 사람들은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만 찾아서 한다. 실패가 감지되면 도전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신뢰 속에서 자란 이들은 뭐든 시도해 보려는 성향이 생긴다. 이들에겐 "the best"가 아니어도 "my best"면 충분하다. 실패를 거듭해도 '믿어주는 구석'이 있으니 괜찮다. 이렇게 보면 "the best"와 "your best"의 차이는 실로 크다. 세상이 모든 것을 자기 발 밑에 두는 '최고'를 말할 때, 신뢰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최선'을 말하는 일은 참으로 값지다. 


신뢰는 연대의 토양에서만 가능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your best"를 강조하며 "나/너"의 이분법을 심화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Your best"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Our best"가 무엇인지 먼저 논의해야 한다. 무엇보다 신뢰가 그저 개인적인 운에 의해 배분되지 않고 사회적 자산으로 존재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our best)"에 대한 고민 없는 "너의 최선(your best)"은 자칫 사회경제적, 심리적 폭력으로 흐를 수 있다. 사회가 자신의 책임, 즉 "our best"를 방기하고 '너희 각자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해!'라고 말할 때 각자도생의 지옥이 만들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이미 그런 사회이기도 하지만. 


나가며: 거부하고 싶은 "We", 감동을 주는 "We"


"편치 않은 We"가 있다. 주차 딱지를 끊을 때 경찰관이 다가와서 "We don't want to park here, do we? ((우리) 여기 파킹하면 안 돼요. (우리) 다 알잖아요?)"라고 말할 때, 전혀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We can do this together. (우리는 함께 이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라 말을 건넬 때 그렇다. '도대체 왜 너와 내가 '우리'로 묶여야 하는 거지?'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 상황들이다. 물론 한국어에서도 '우리'를 쓰는 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e.g. "우리가 남이가?" "응, 남이야.")


이와 반대로 감동을 주는 '우리(we)'도 있다. 필자가 논문을 반쯤 썼을 때, 나머지 반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지도교수에게 챕터 하나를 보내며 "마감 안에 끝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지도교수가 안 된다 하면 한 학기를 더 다녀도 할 말이 없는 상황. 그런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내용은 단 한 줄. "Sungwoo, we can finish this dissertation together."였다. "우리가 함께 논문을 끝낼 수 있다"라는 말 한 마디가 큰 힘이 되었고, 논문을 기한 내에 완성할 수 있었다. "We"라는 대명사 하나가 허우적거리던 나의 영혼을 구한 것이다!


누군가와 같은 시공간을 살아간다 해도 우리(We)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아야겠다. 몸맘으로 누군가와 오래 함께하지 못한다면 감히 "우리"라고 말하지 말아야겠다. 그럼 난 누구에게 자신있게 "우리"라는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솔직히 누구에게도 그럴 자신이 없다. 하지만 "최고(the best)"도 "너의 최선(your best)"도 아닌, "우리의 최선(our best)"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다정하게 이 말을 해주고 싶다. 


"Your best is enough. Trus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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