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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May 30. 2022

아픈 몸들 vs. 불쾌한 골짜기

그리고 비판 리터러시가 나아갈 길

1. 사회언어학 시간에 학생들에게 다른 몸들의 <아픈 몸 선언문>을 소개했다. 얼마나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수많은 질문과 고민을 던져준 글이었다. (얼마 전 보니 선언문 업데이트가 진행 중인 것 같다. 아래 선언문에 관심이 가시는 분들께는 조한진희 선생님의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조심스레 추천한다.)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35

2. 아침에 기술철학에 관한 글을 살피다가 오랜만에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개념과 마주쳤다. 원래는 독일어 unheimlich에서 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un-home-ly' 즉, '집에 있는 것 같지 않은', '익숙하거나 편안하지 않은(not at home)'의 의미다.


3. 아래는 위키피디아의 'uncanny valley'에서 가져온 그래프이다. 점선으로 표시된 움직이는 개체를 기준으로 산업용 로봇, 휴머노이드 로봇, 좀비, 의수, 분라쿠 인형을 거쳐 건강한 사람에 이른다. 다른 논문들에는 건강한 사람(healthy person)과 분라쿠 인형(bunraku puppet) 사이에 '아픈 사람(ill person)'이 종종 표시된다. 건강한 사람이 가장 익숙하고 편하며 그 다음이 아픈 사람이라는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Uncanny_valley#/media/File:Mori_Uncanny_Valley.svg

4. '익숙함'과 편안함을 기준으로 했을 때 건강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좀 더 익숙하고 편안할 수 있기에 이 그래프 자체가 완전히 그르다고 할 수는 없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아픈 사람보다 건강한 사람을 더 자주 보는 건 사실이니까. 혹은, 아픔을 철저히 가리고 만남에 임하는 게 보통이니까. 통계적으로 '맞말'인 것이다.

5. 그럼에도 아픈 사람을 덜 익숙하고 덜 편안하게 보는 세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픈 사람보다 건강한 사람이 편하고 익숙한 건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명제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아픈 몸 선언문>의 첫 부분을 음미한다면 말이다.


현재 사회는 아픈 몸을 차별, 배제, 혐오한다.

질병은 생명체에게 필연이고, 과거 인류에게 생로병사는 삶의 일부였으나 자본주의와 의료 권력은 생·로·병·사를 특수이자 문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자본과 의료가 결합하면서 건강의 기준은 더욱 높아지고, 아픈 몸은 의료시장의 소비자가 되었으며, 더 많은 의료 소비를 낳았다. 자본은 강도 높은 노동이 가능한 몸만을 ‘좋은 몸’, ‘표준의 몸’으로 설정했다.

우리는 아플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산다.


6. <아픈 몸 선언문>이 말하는 '건강중심 사회'는 아픈 몸을 주변화하고 '비정상적'이며 '비효율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상화된 건강한 신체를 중심으로 배치되는 권력은 결국 우리 각자의 지각(perception)에 영향을 미치고 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을 미세하게 조정한다. 그것은 '정상성/비정상성'의 양자택일 모드가 아니라 멋지고 아름다운 것, 촌스럽고 추한 것들의 스펙트럼을 생산하는 무의식적 기제로 작동한다.


7. 그런 의미에서 비판 리터러시 교육은 옳은 정보와 그른 정보, 과학적 정보와 비과학적 정보를 구분하는 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정보들이 우리의 감각경험을, 미적 기준을 어떻게 세밀하게 조정하고 또 왜곡하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활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픈 몸 선언문>이 '불편한 골짜기'를 가로지르며 고민의 지평을 확장해야 한다. 결국 '객관적' 지식이 '주관적' 지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과학적' 모델은 '예술적' 재현(representation)과  어떻게 엮이는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8. 비판리터러시는 지식과 개념을 거쳐 몸으로, 정서와 미적 경험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순차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전통적인 리터러시가 인지적이고 상징적인 면에 천착했다면 이제 신체의 구체적 경험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많은 분들이 언급해 주셨듯이 박경석 전장연 대표와 이준석 국민의 힘 대표의 토론에 대해 많은 이들이 후자의 압승을 외쳤던 건 그들의 판단이 철저히 기성 리터러시의 권력에, 그것이 암묵적으로 강화해 온 지각의 문법과 미적 판단의 기준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이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한다.



#비판리터러시 #삶을위한리터러시 #지극히주관적인어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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