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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이아 Jun 11. 2022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들

그리고 나의 탈식민 일지(my decolonization notes)


1. "마지막 원고를 넘기자 출판사에서 이메일이 들어왔다. "소설 두 권을 검토해주세요." 난 공손히 답신을 보냈다. "제가 얼마 전 은퇴를 했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입니다." 내 삶을 착취한 망할 시스템에 생애 최초의 빅엿(?)을 날리는 순간이다. 노동할수록 더 많이 빼앗기는 삶이여, 이제 안녕."


번역가 조영학 선생께서 은퇴를 선언하며 남긴 칼럼의 마지막 문단입니다. 대학에 한 발 걸치고 살아갈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강의노동에서 은퇴하기 전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을 던져준 글이었습니다. 한편 마지막 "노동할수록 더 많이 빼앗기는 삶"이라는 대목에서는 예전의 제가 떠올라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60309450002858 


2. 과거를 다시 살아도 더 나은 선택을 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생각에 큰 후회를 하지 않는 편입니다만 타지에서 돌아와 처음 5년 여 살았던 방식은 절대로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의 여파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고, '탈숙련 번아웃 전문 노동자'라는 자조섞인, 하지만 나름 객관적인 닉네임을 쓰기도 했었죠. 당시에는 궁지에 몰렸다 생각했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계속해서 자신을 몰아부쳤고, 그런 삶의 불가피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제가 택했던 길만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더 나은 길은 모르겠지만 다른 길은 분명히 있었죠. 지금의 삶이 그걸 증명하고요.


3. 새벽에 마음 아픈 꿈을 꾸었습니다. 이번 학기 수업을 듣고 있는 대학원생 중 하나가 과제를 기한 내에 내지 못할 것이라 말하는 꿈이었습니다. 왜냐고 묻자, 4과목을 듣는데 지금부터 단 한 숨도 자지 않고 과제를 해도 과제를 기한 내에 완성할 수 없다는 계산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학생의 얼굴을 보는 게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괴로움에 깨어나자마자 아래 쪽글이 생각났습니다. 영어로 썼던 글이라 원문을 병기합니다.


Photo by Elisa Ventur on Unsplash


4. One of the persistent academic dilemmas as a critically-minded applied linguist: critics of the neoliberal subject are largely a prime example of the very neoliberal subject. How do we live against the desire of perpetually achieving more and for the ideals of mutually caring, sociomaterially sustainable ways of life? (비판적 지향을 지닌 응용언어학자로서 마주하게 되는 지속적인 학문적 딜레마 중 하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에 대한 비판자들이 대개 바로 그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가장 빼어난 예라는 점이다.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성취하려는 욕망에 저항함과 동시에 서로를 보살피며 사회물질적으로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이라는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 수 있을까?)


5. 다음 학기 대학원 수업을 디자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본 드라마의 영문 제목을 가져와 "나의 탈식민 일지(my decolonization notes)"라는 부제를 달아 놓았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별 생각없이 부여해 왔던 기말과제 수행에 대해 고민을 해봐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목소리에 좀 더 유연하게 대응해야겠지요. 적어도 기말 기간에 번아웃을 경험하는 학생들이 없도록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여러분들의 부담을 알지만 조금이라도 더 나누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다'라는 식으로 쉽게 합리화하지 않고요.



7. 솔직히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비판하는 '뛰어난'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이라는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저도, 주변의 적지 않은 연구자들도 여전히 허덕대며 살아가니까요. 하지만 분명한 건 저 스스로를 덜 착취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삶을 좀 더 적극적으로 나누려 하고 있고요. 아마도 저의 '탈식민 일지'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무언가 하고 있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기'일 듯합니다. 그것은 다시 시간과 관계의 밀도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겠지요.


8. 언젠가 끄적였던 짧은 메모를 꺼내 봅니다.


<연대 Solidarity 에 대한 짧은 생각>


일상은 질주한다.


그 무서운 속도를 어떻게 늦출 수 있을까.


아마도 혼자는 힘들거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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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몰아치는 세상이지만 부디 쉼이 있는 주말 보내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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