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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 설 Dec 23. 2022

경력단절 해제하기

취직일기Ⅰ

 아이가 24개월이 지나고 어린이집에서 할애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 육아 시간도 짧아졌다. 내 시간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공교롭게 남편이 운영하던 카페마저 폐업하면서 남편 역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우린 자연스럽게 감정적으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먼저 튕겨 나갔다. 일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아이가 없는 시간엔 컴퓨터 앞에서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인크루트, 사람인, 잡코리아 등등 구인사이트를 이 잡듯 살폈다. 하지만 결혼 후 검색조건은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야근이 있으면 안 되고, 거리가 멀어서도 안 되며, 30대 중후반의 여성을 경력으로 우대해 줄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단절된 경력을 우대해주는 까다로운 조건이라니, 검색 결과는 100분의 1로 확 줄었다. 아예 검색이 안 되는 구인사이트도 있었다. 할 수 없이 거주지인 경기도에서 서울까지 조건을 확대해야 했다. 급기야 1시간 초과 근로 정도는 기꺼이 용인할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드디어, 구직활동 약 2개월여 만에 1차 서류전형이 통과되어 면접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면접 전날, 수년 만에 정장을 꺼냈다. 정장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결혼 후 아이가 찾아오면서 6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당시 운전면허도 없던 내가 임산부의 몸을 하고 경기도에서 서울 강남까지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할 엄두가 나지 않아 내린 결정이었다. 퇴사 직후부터 약 2개월 정도는 태교에 집중하면서 여유를 만끽했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급격한 호르몬 변화와 회사를 떠나면서 얻게 된 상실감은 우울증으로 돌아왔다. 운전을 할 수 없었던 내게 경기도의 작은 택지는 외딴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때의 외로움이 떠올라 정장을 끌어안고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어딜 가든 그곳에서 뼈를 묻으리라.     


 면접 당일, 아침 일찍 일어나 외출 준비를 했다. 면접은 9시 20분. 넉넉하게 출발하기 위해 서둘러 탔던 광역버스 안은 출근 중인 직장인들로 만석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이 많다니. 여느 날 같았으면 나는 꿈나라였을 시간이었다. 새삼 게을러진 내 일과가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그들의 아침이 부러웠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것은 나에겐 에너지와도 같다. 나는 나의 생산성을 소비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절실함을 어떻게든 어필해보겠노라 다짐했다.


 “들어오세요.”


 면접에서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보여주기 위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그러나 턱, 걸리는 순간이 있었다.


 “결혼하셨어요? 집이 꽤 먼데, 출퇴근 자신 있으세요?”

 “자신 있습니다. 출퇴근도 좋아하는 긍정마인드라.”

 “아이도 있네요?”

 “.... 아이가 있는 게 문제가 되나요?”


 내 면접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발끈했다. 남자들의 면접에선 하지 않는 질문을 왜 여자들의 면접에선 받아야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여기까지가 인연인가 싶어 미련을 두지 않았다.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난 또 핸드폰으로 구인광고 앱을 켰다. 덜커덩거리며 한강철교 위를 달리는데 처음으로 ‘대한민국에서 여자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결혼하셨어요.’라는 질문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그 여섯 글자를 기억하며 다짐했다.


 ‘면접 자리에서 그런 질문을 하는 회사라면 오라고 해도 내가 안가!’     


 첫 번째 면접을 본 다음 날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켜놓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던 남편이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어제 면접 본 곳은 별로야? 안 될 것 같아?”

 “아니, 내가 결혼 정보회사 회원 등록하러 간 것도 아닌데 결혼했는지는 왜 물어봐?”

 “그런 걸 물어봐, 면접 보면서?”

 “애도 있냐고 묻더라. 뻔히 가족관계 다 기재했는데. 왜 왔냐고 묻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빴어. 거긴 오라 그래도 안 갈 거야.”


 남편은 멋쩍은 미소로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나는 겉으로는 씩씩대고 있었지만 은근한 속상함이 물밀 듯 밀려와 내 마음을 후벼 팠다. 눈앞의 사람인 사이트가 뿌옇게 흐려졌다. 순간 양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국가에서는 결혼하라고, 애도 제발 낳으라고 여러 가지 정책을 내놓고는 있지만, 실상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걸 직접 체험한 것이다. 그건 기업인들에게 종용해야 할 미래다. 국가가 아무리 정책 갖고 발버둥 쳐도 기업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우리 서민들은 영원히 치일 수밖에 없다. 그날 난, 이 둘 사이의 피해자나 다름없었다.      


 첫 번째 면접 후 약 나흘 만에 좋은 조건의 구인정보가 눈에 띄었다.


 “여보, 여기 어때? 포천이야. 전에 다니던 곳이랑 같은 분야고.”

 “연봉은?”

 “전에 받던 연봉 수준은 힘들 것 같아서 좀 낮췄어. 어쩔 수 없어.”


 아쉬운 듯한 눈치였지만 남편도 수긍했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구인난, 구직난이라며 뉴스마다 난리지만 정작 회사는 낮은 연봉에 높은 업무량을 요구한다. 또한, 구직자는 높은 연봉을 원하면서 시간적 여유로움도 꿈꾼다. 조율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젊은 부부들은 임신을 부담스러워하고 그것은 곧 인구 수직 하락으로 이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력에 투자해야 할 비용은 가중되고 이윤추구에 눈이 먼 기업은 인력난이라는 부메랑을 맞게 되겠지. 사람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회사가 많아져야 한다. 그 말은 곧 개개인의 삶을 인정하고 인격을 존중하는 회사만이 부메랑을 피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난 어쩔 수 없이 한발 물러서 연봉을 낮추고 입사 지원을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회신을 받을 수 있었다.


 두 번째 면접의 기회는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지리적 위치에 있었다. 집과는 차로 불과 15분 내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다. 더구나 결혼 전 일했던 곳과 같은 연구 관련 제조업체였다.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뾰족구두를 신고 아스팔트가 깔린 산길을 올라갔다.


 ‘이런 곳에 회사가 있어?’


 멋 부리다가 얼어 죽는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늦겨울과 초봄이 만나는 3월 초, 아직 해가 중천에 마중 나와 있지 않은 아침의 야산은 추웠다. 아스팔트로 잘 포장하긴 했지만, 오르막길을 뾰족구두를 신으며 올라가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숨을 헥헥거리며 한숨 돌리려는 찰나, 멀리 그곳이 회사임을 알리는 간판과 차량 수십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회사는 꽤 컸다. 긴장되는 마음을 가다듬고 사무실로 진입해 주차장에 진을 치고 있던 길고양이 울음소리보다 작은 목소리로 내 존재를 알렸다.


 “저기.. 면접 보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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