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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 설 Nov 15. 2022

일상을 함께 해 볼까

김행숙 시집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문학과 지성사, 2021)읽고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는 마치 소설집 같다. 혹은 시를 가장한 에세이라고 할까. 분명 제목이 있고, 짤막한 시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앞장의 이야기와 뒷장의 이야기는 열차처럼 이어져있다. 그래서 단락이 끊기는 느낌 없이 읽힘이 매끄럽다. 어렵게 다가올 수 있는 시의 표현을 일상에서 찾아내 독자를 기어이 책상에 앉혔다. 처음 몇 장은 침대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그러다, 40장을 넘기면서 책상으로 이동했다. 본격적으로 책을 염탐하기 위해서다. 더 정확히는 그녀의 삶을 깊게 훔쳐보고 싶었다. 이야기는 그녀의 일상을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문장이 난해하지 않고 친근했다. 일상어를 놓고 시를 쓸 수 있는 건 그녀의 탁월한 능력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열한 일상어는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 마치,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오랜 친구의 편지를 읽는 것 같다.


죽은 사람의 이야기는 기억하면 모두 유언처럼 무거워지는 법,
함부로 기억하지 마라.
그러나 너도 들어봤을 거야.
그날도 여행자는 낯선 마을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불꽃이 재가 되듯 폭삭 늙어 벼렸더라는 황당한 이야기.
그러나 얘야, 그것은 내 이야기야.  
-「체크아웃」 中


 혼자 떠난 여행길, 게스트 하우스 주인장에게 듣는 오싹한 이야기는, 홀로 나선 여행길에서는 오히려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 재미난 굴뚝 천사 이야기는 또 어떤가. “지상으로 내려온 천사의 얼굴은 까맸고 다른 천사의 얼굴은 여전히 희멀건했다지” (「굴뚝청소부가 왔다」) 오랜만에 외갓집에 갔는데 둥근달 밑의 초가집 아랫목에 누비이불 덮고 누워 할머니의 천사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그런데 천사 이야기에서 갑자기 유대인이 등장한다. 이상한 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약 3장에 걸친 이야기는 단락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맥락이 꺾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작가의 화법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 있다.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지만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고 더 집중하게 만든다.  


 다음은 무슨 얘기를 들려줄까? 당신은 언어의 마술사.


 21세기의 시는 이런 것이다. 혼자 하는 독백이라기보다 차라리 다 함께 외치는 메아리다. 난해한 문장과, 함축적인 의미만을 담은 서사물이 아니라 일상을 담아 어렵지 않게 해석한다. 넘치는 이야깃거리를 뱉어내지 않고 친근한 문장으로 담아내는 것, 그것이 산문시가 갖고 있는 장점이 아닐까. 나는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를 읽고 21세기의 시문학을 다시 느꼈다. 흥미로운 건, 작품마다 경어를 쓰기도 하고 흔하게 반말이 툭툭 던져지기도 한다. 화자가 동일인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아니라 대화의 기분을 들게 했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시, 참으로 오랜만이다. 아직 절반도 읽지 못한 시점에 내가 이렇게 할 말이 많은 건 책이 내게 주는 신선함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부터 난, 그녀의 열정적인 독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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