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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 설 Nov 06. 2022

비는 가끔 좋은 위로가 된다

비를 사랑하는 이유

 나는 비를 참 좋아한다. 학창 시절의 나는 항상 네 명의 무리와 함께였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넷 중 두 명이 우산을 갖고 오지 않았다. 각각의 우산에 두 명씩 몸을 구겨 넣으며 비를 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중 한 친구가 우산을 접고 신나게 비를 느끼자는 말에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빗속에 몸을 내어주었다. 하얀색 반 팔 카라 블라우스에 초록색 바탕에 갈색 두 줄 체크무늬의 촌스러운 교복 치마가 홀딱 젖었지만, 그때 우리는 정말 행복했고, 그 기억은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아마도 내가 비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가끔은 비를 맨몸으로 느끼는 것보다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다. 몸은 하염없이 보송한 곳에 기대어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면 이질감에서 오는 야릇한 쾌감이 있다. 나를 지켜주는 공간과 감성을 자극하는 소리는 그 순간 가장 잘 어울리는 하모니가 된다. 그때는 늘 홀딱 젖은 학창 시절을 떠올린다.     


 비는 가끔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휴가를 내거나, 여행이 계획되어 있으면 어김없이 비가 왔다. 심지어 미리 날씨를 확인하고 여행을 잡았음에도 여행 당일엔 태풍이 몰아치기도 했다. 그래서 여행 사진에는 항상 우산이 함께였거나 우비를 입고 찍었거나 준비된 무엇도 없이 물에 빠진 고양이 마냥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사진도 있다. 비는 그렇게 가끔 아쉬운 추억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비가 오면 풍기는 그만의 냄새가 좋았다. 비는 땅의 흙냄새와 들의 풀냄새 등 자연의 향기들을 모두 안고 자신을 표현한다. 인공적인 것들에 길들여진 도시에서 비가 주는 냄새는 오로지 자연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는 수단이다.     


 비는 일반적으로 기쁨이나 환희를 표현하는 형용사로 쓰이지는 않는다. 거뭇거뭇한 하늘에서 뿌려지는 비는 광합성을 차단하고 기분을 가라앉힌다. 그때 듣는 비보는 슬픔을 배가시킨다. 보슬보슬 차분한 비가 내리던 날, 내가 본 문자는 그 자체로 눈물이었다. 비가 눈물로 바뀐 순간이었다.

  -자궁암 검사 결과 이형성증 소견으로 내원하여 상담 진행 부탁드립니다.-

 자궁경부선암이었다. 암. 40대 중반을 목전에 두고 있는 내게 다가오기엔 너무 이른 병명이었다. 4년 전부터 추적 관찰하고 있었던 터라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였는데도 마음이 착잡했다.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내리는 비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가라앉았던 마음이 묘하게 위로받는 기분이다.

  ‘내가 널 대신해서 울어줄게. 슬퍼하지 마.’

 비가 내게 말을 걸듯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창밖을 바라보며 비와 소통하고 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비를 느꼈다. 오랜만의 감촉이었다. 참, 좋았다. 오래 손바닥을 뻗고 있었는데도 다 젖지 않았다. 비가 떨어진 부분에만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거센 비를 맞아도 반드시 젖지 않는 부분이 있다. 비는 나에게 필요한 만큼만 조심스럽게 위로해주고 있었다. 그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소리로 주는 위안,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건 비뿐이다.     


 40대 중반, 지금 나의 날씨는 비다. 비단 암이라는 병 때문만은 아니다. 내게 비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함께 한다. 다행히 빨리 발견된 암을 제거하고 건강한 행복을, 또 이것도 인생의 교훈으로 여기고 운동을 시작하는 계기로 나를 돌이켜보며 비를 맞이할 것이다. 메마른 땅의 비, 그 비는 숨을 쉬게 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지닌다. 쉴 새 없이 달려온 인생에 잠시 쉬어가는 쉼표를 대하듯 지금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맞고 있다. 홀딱 젖은 몸으로 서로의 모습을 보며 웃고 행복해하던 학창 시절을 떠오르게 하고, 여행 때마다 성가시게 따라다녔던 비란 녀석. 가끔은 나를 소리로 위로하고 촉촉한 감성을 끌어주는 깊은 정을 나누는 친구 같은 녀석, 비. 물론 내 몸은 젖을 것이고, 내가 지나가는 곳마다 물이 떨어지며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것이 내가 비를 사랑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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