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 사회』의 저자는 내가 재학 중인 사이버대학교 가을학기에 신설된 교양과목의 교수다. 『대리 사회』는 어쩌면 내게 필연적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재학 중인 학교 교수의 저서라서가 아니라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면서 끊임없이 사유함에 지금 나의 상황에 위로와 격려,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한 번쯤 더듬어 기억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타인의 운전석에 앉은 대리기사지만 해당 차량 브레이크와 엑셀의 주인이 된다. 하지만 주인으로서 주체하지 못한다. 운전석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님에 타인의 운전석으로 정의하고 운전을 대리한다. 그 속에서 사유는 통제되며, 주체로서 그 시간의 내 인생을 대리한다.
처음 충격적이었던 건 ‘강의 경력증명서’라는 부분에서였다. 엄연히 연구실이 있는 교수인데 강사라는 이유로 ‘재직 증명서’ 발급 대상이 될 수 없었다는 부분은 10여 년을 한 기업의 근로자로서 일했던 내게 신박한 충격이었다. 더구나 그의 일터는 식자층의 모임터가 아닌가. 그 속에서 법이 준하는 기본이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난 경악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현 교수자들의 위치란 말인가. 가장 똑똑한 계층의 가장 비겁한 법망 헤쳐가기다. 본문에도 나왔지만, 그곳에서 그의 ‘대리운전’을 응원해줄 이는 장담컨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그래서 논문 쓰겠냐, 그 시간에 논문을 한 줄 더 써, 한심하다, 교수님들은 아직 모르시니까 일 빨리 그만두고. -「썩어버린 먹물들, 안녕히」 中
수 달 전, 라디오에서 국내 활동 중인 외국인이 한국어에 대한 장점을 얘기한 걸 들은 기억이 있다. 영어권에서 언어란 ‘신분의 위치와 최종학력의 명함 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반면 한국어는 신분의 위치를 알 수 없는 온 국민에게 동등한 언어라며 극찬했다. 그런데 이 대목을 무색하게 하는 일화가 본문에 쓰여 있었다. 두 번을 만났다는 그 손님은 저자의 단어 선택 하나만으로 그를 ‘공부를 오래 한 선생님’으로 단언했다. 내가 알기로, 국회의원의 국회의사당 안에서는 저속한 비속어가 난무하고, 일부 대학교수들 역시 사석에서는 예외가 아닌 줄로 안다. 무엇이든지 단면만으로 사람을 부류로써 구분하려 하면 그건 사유 안에서 큰 오류다.
대리의 또 다른 언어로 저자는 강태공과 허생을 예로 들었다. 난 그 대목에서 ‘와, 대박!’을 외쳤다. 대리 사회를 설명하는데 ‘내조’와 ‘아내’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저자의 탁월한 언어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내의 어원을 검색하면 ‘안해’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안’이라는 ‘밖’의 반대말과 ‘에’라는 접미사 붙어 ‘안해’가 만들어졌다는 설명이다. ‘안해’라는 어원이 ‘집 안의 해’라고 아내를 존중하자는 의미로 고급화되고 있지만 적확한 어원의 뜻은 전자이다. 그러나 배우자로서 가장 대접받는 느낌의 단어는 나 역시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아내’다. 바퀴 굴러가듯 자연스럽게 구개를 훑고 지나간다. 난 저자가 꾸준히 ‘아내’라는 단어를 쓰길 바란다.
대리를 지칭하는 트렌드로 저자는 ‘먹방’을 예로 들었다. 실로 ‘먹방’을 보며 식욕을 억제하며 대리만족을 느꼈다는 이들이 많다. ‘먹방’ 뿐만 아니라, 노래 경연대회, 요리 경연대회 등 무슨 무슨 대회가 어느 순간 우후죽순 생겨났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을 대리로 사유한다. ‘난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행복해, 너도 그렇지?’ 그리고 그 물음에 대답하는 수많은 시청자는 제작자들에게 또 다른 비슷한 프로그램을 만들게 한다. 앞으로 어떤 방송이 제작과 심의를 거쳐 나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역시 우리의 만족을 대리하기에 충분해야 할 것이다.
을과 을의 전쟁은 너무 참혹하다. 이‘을’도 맞는 것 같고, 저‘을’도 안타깝다. 그들의 전쟁은 갑에게 보기 좋은 볼거리일 뿐이다. 그들의 싸움에서 떨어지는 자는 갑에게는 ‘애초부터 필요 없는 사람’이거나 ‘을의 전쟁에서 지쳐 떨어진 나약한 짐 덩어리’로 치부되기 쉽다. 어쨌든, 갑에게 남아있는 ‘을’은 그의 편에 속한 ‘내 사람’ 일 테니까. 저자의 마음이 안타까웠던 것은 그의 순수함이었다. 난 강의를 들으면서 본문의 내용을 수없이 읽어왔다. 그러면서 당연히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저서는 저자가 품은 폭발물이라 생각했다. 갑은 항상 그랬다. 세상은 늘 갑의 편이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을’은 갑의 편에 속해 있어야 성공한다고 믿는다. 대학이라는 식자층이 들끓는 울타리에서 비정규직이 아닌 전임교수를 꿈꾸는 시간강사에게 저자는 내부고발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뜻한 격려와 응원을 기대했다는 대목에서 저자의 처절함이 느껴졌다. 내가 대신 어깨를 두드리며 잘 나왔다고 격려하고 싶었다.
저자는 타인의 운전석에서 통제받았던 모든 것들을 글로 쓰며 사유했다. 가장 마지막 기록의 첫 문장은 “이 글은 책상보다는 거리에서 주로 썼다”(「다시 거리로 나아간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작은 수첩에 때때로 그의 고단함을 기록했을 모습을 떠올리니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그의 인생에 작은 응원과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그리고 한밤중 길거리의 수많은 대리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익숙하지 않은 자리에서 익숙하게 운전해야만 하는 대리기사님들에게 격려와 감사 인사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