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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 설 Nov 11. 2022

우리 사회는 누구를 원망할 수 있을까

-영화 『아무도 모른다』(디스테이션, 2005)를 보고

 책과 영화의 공통점은 반복적으로 접할 때마다 그것을 마주하는 마음이 매번 바뀐다는 것이다. 때문에, 작품이 주는 메시지를 해석하는 방법도 달라진다. 난 영화『아무도 모른다』를 반복적으로 돌려보았다. 무의식 중에도 지워지지 않는 몇몇 장면들이 화석처럼 남아있어 가끔 내 감정을 자극했고, 그 자극은 반복 재생으로 이어졌다.      


 영화의 주인공은 12살의 남자아이, 아키라(야기라 유야). 극 중 후쿠시마 케이코(유)의 큰아들이자  남매의 실질적인 보호자이다. 필름의 첫 장은 마지막 장을 잇고 있다. 그리고 이사를 시작으로 화면은 이어진다. 아버지의 부재만 아니라면 여느 가정과 다를 것 없는 것처럼 시작했지만, 케이코의 잦은 장기 부재로 아이들은 서서히 방임에 노출된다. 케이코는 떠나기 마지막 날 둘째 딸 교코(키타우라 아유)에게 매니큐어를 발라준다. 술에 취해 삐뚤빼뚤한 그녀의 손놀림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부재로 와닿아 마음이 아팠다. 케이코는 교코의 손톱에 매니큐어가 다 지워질 때쯤 선물 보따리를 들고 아이들을 찾아온다. 이날 엄마가 다시 떠날 걸 예감했던 교코는 케이코와의 재회를 위해 다시 매니큐어를 손에 집다가 떨어뜨린다. 그 자국은 고스란히 바닥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케이코는 떠났다. 매니큐어가 지워져야 ‘엄마’는 돌아온다. 하지만 바닥에 쏟아진 매니큐어는 지워지지 않았다. 보호자 없이 남겨진 네 남매 중 막내 유키(시미즈 모모코)는 이사 후 몇 계절을 지나 첫 외출을 감행한다. 외출을 준비하며 꺼낸 신발은 유키에게 맞지 않는 작은 삑삑이 신발과 엄마의 마지막 선물인 가방이었다. 아이가 방임되고 있음을 아이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걸 정확하게 연출한 셈이다. 더불어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의 간절함이 아이의 어깨에 멘 가방에 담겨있다.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영화는 필름마다 감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아낌없이 표현했다. 감독은 사키(칸 하나에)의 등장으로 왕따와 청소년 성매매의 문제도 함께 다루었다. 여러 아동, 청소년을 둘러싼 총체적인 사회문제를 2시간 남짓한 영화 한 편에 모두 담기는 어렵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최선을 다해 필름에 새겼다.


보호자는 없지만, 아이들은 성장한다. 사춘기가 되고, 성인이 되고 생각이 바뀐다. 그 흐름은 영화를 보는 이를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꽃은 피는구나.’


 시게루(키무라 히에이)가 테라스의 화분에 물을 주는 과정에서 화분이 떨어져 깨져버리는 장면에는 가슴이 덜컥했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필름에 새긴 복선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방임 문제를 케이코의 부재로만 보지 않았다. 부부의 문제, 주변인들의 문제, 나아가 사회의  문제다. 영화 초반 케이코와 아키라의 대화 장면에서 케이코의 대사는 이 문제를 확장시켜 해석하게 했다.     


 엄마가 멋대로라니. 누가 제일 심한데? 네 아빠가 제일 문제지. 혼자 사라지고.   


 『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일본 도쿄에서 발생된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일본 내에 상당한 파급력을 가진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동학대 문제에 명확한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아동 문제는 비단 일본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20여 년 전부터 아동폭력, 방임 문제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이에 대한 명확한 대책은 없고 반복적인 관련자들 소환 조사나 사퇴로 사건이 마무리되거나 ‘학대치사’,‘심신 미약’의 어쭙잖은 어로 가해자를 용서한다. 사회는 왜 아동에게 가혹한 것일까. 인천공항의 야경을 보았는가. 서울의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야경을 보았는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야경이 누군가에게는 가혹한 한 장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면서 왜 제목이 『아무도 모른다』인지 생각해봤다. 어쩌면 아무도 모르는 것이 아닌, 이 사회가 모르는 ‘척’ 넘기기 때문은 아닌지 곱씹게 된다. 아동이 방임되고 있음은 신체 학대만큼이나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이나 신발을 착용했다거나, 머리카락의 청결 관리가 안 되는 것 같다거나, 지나치게 왜소하다면 우리 이웃이 한 번쯤은 가볍게라도 의심해 봄은 어떨는지, 그것만이 아동학대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아동학대는 현재로서는 관심이 최고 예방책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라면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한 번씩 깊은 마음으로 새겨보길 바란다.

 해당 영화는 2017년에 재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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