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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 설 Nov 23. 2022

눈 오는 날 눈 위에 첫발을 내딛을 때

―고수리『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수오서재, 2022)를 읽고

 고수리 작가가 최근 출간한 작품 『마음 쓰는 밤』이 작가의 일상을 그린 이야기라면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는 오로지 인간 고수리로서의 삶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일과 사랑, 가족사까지 그녀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언젠가 그녀는 ‘겨울’을 좋아한다고 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녀가 겨울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프지만 따뜻했던 겨울. 그래서 그녀의 겨울이 더 사무치게 다가왔다. 추움을 이기는 두려움, 그 두려움 안엔 안타까운 증오도 함께였다. 세월이 조금씩 그 감정을 무뎌지게 만들고, 그날의 따뜻함은 영원히 깊게 남아 있었다.     


 숨어 있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시동을 꺼둔 차 안은 냉장도 같았다. 말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집보단 나았다. 함께 안전하게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중략) 밝고 포근하고 조용한 눈. 우리는 이글루 같은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눈이 내려서 고마운 새벽이었다. -「사랑이 존재하는 한」 中     


 그녀의 탁월한 서정적인 글맛은 모친에게 이어받은 유전의 힘일까? 글 구석구석 묘사된 그녀 모친의 언어는 정말 가슴을 뛰게 하는 설렘이었다. 어떻게 이런 비유가 가능할까.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온 감탄사는 어느새 독서의 장단이 되어 있었다.     


 “자작나무 같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가만히 얼룩을 바라보는 엄마. 검버섯을 처음 발견했을 때도 엄마는 이렇게 목욕탕에 앉아 있었다고 했다. (중략) 그 모습이 꼭 자작나무 같더라고, 하얀 껍질에 까만 점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자작나무 같더라고 그랬다.「사랑이 존재하는 한」 中     


 내가 다니는 회사 앞에는 자작나무 숲이 있다. 아마도 사유지인 그곳 땅 주인이 자작나무를 좋아하기 때문이리라 생각하고는 있지만 볼 때마다 그에게 참으로 고맙다. 여름엔 앙상한 어린잎이 듬성듬성 매달려 있고, 겨울엔 그마저도 없고 볼품없지만 강인하게 숲을 지키고 있다. 그곳을 지나면 바람 소리마저 은은한 향을 가진 하모니가 되어 내 귀에 꽂힌다. 그녀 모친의 다리에 새겨진 자작나무는 그 숲에 연륜까지 더해진, 앙상하지만 꿋꿋한 자작나무다. 탕 안의 그 자작나무를 닮은 다리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와서 결국 눈물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가슴 아픈 사랑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최강 동안, 모태 미녀 그녀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풋풋한 사랑의 아픔은 풋사과 향이 났다. 당시야 어찌 됐건 마음이야 아팠겠지만, 그녀의 청춘 시절 사랑 이야기는 여느 로맨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풍덩”(「걸을 수 있으니까」) 그녀의 사랑 이야기를 가장 설레게 하는 단어였다. 그녀의 잔잔한 사랑은 어느새 그녀 인생의 리듬으로 함께 발맞추고 있었다. 사랑에 경력이 존재할까? 사랑은 할 때마다 낯설다. 상대가 누구든, 몇 번째 사랑이든 상관없다. 수없이 많은 이별을 경험해도 이별은 늘 처음처럼 힘들고, 사랑은 언제나 처음처럼 설렌다. “그때 우리가 능숙하게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면, 적당히 사랑하고 깨끗하게 헤어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면, 그토록 지질하거나 아프지도 않았을 텐데...”(「걸을 수 있으니까」) 아마도 그녀의 마음에 깊은 여운과 후회와 미련이 있었나 보다. 그것은 사랑이 너무 깊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누구에게든 언제나 이별은 아픈 법이다. 능숙하게 사랑하고, 깨끗하게 헤어지는 방법은 내가 아는 한, 아직 지구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 있었더라도 그건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사실 책을 읽기 전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야 더 잘 읽힐 것 같았고 맘껏 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난 메시지의 답장을 받기도 전에 울어야 했다. 그녀의 폴란드 머그컵 때문에. 글을 마치면서 그녀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어머님의 따뜻한 배려심을 닮은 햇살 같은 작가로 지금처럼 남아 주길. 갑자기 그녀에게 폴란드 머그컵을 선물하고 싶은 건 왜일까. 언젠가 만나게 될지 모르니 미리 준비해놔야겠다. 이왕이면 수국이 그려진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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