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광역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로 나가기 위해서다. 남양주에서 잠실까지 직행으로 가는 광역버스를 타면 지명이 ‘읍’으로 끝나는 촌에서 ‘동’으로 끝나는 도시로 3, 40분 내 이동이 가능하다. 이태원 참사 이후 광역버스 내 입석이 금지되는 바람에 버스에 자리가 없으면 어쩌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이용한 버스 정류장은 내가 속한 ‘읍’의 촌에서도 남은 좌석 수를 일러주는 빨간 LED가 깜박이고 있었다. 와, 세상 진짜 좋다.
차에 앉아서 오랜만에 차에서의 독서를 시작했다. 책을 펴는데 순간 좌석에 붙은 USB가 눈에 들어왔다. 나의 두 번째 감탄사의 발사 지점이다. 차에서 핸드폰을 충전할 수 있다니! 그동안은 자가용이 이동수단을 대신했었기에 이렇게 대중교통에 편의시설이 생긴 줄은 몰랐다. 내겐 그야말로 신문물이었다. 30여 분 지났을까, 익숙한 거리가 눈앞에 펼쳐졌다. 15년 전에도 저긴 언제나 줄을 서서 복권을 샀었어. 그래. 저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게 아니고 행복을 사는 거야. 와, 잠실 11번 출구까지가 이렇게 멀었었나. 수년 만에 찾은 잠실역의 풍경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도 바뀌어 있었다. 마스크였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때를 잠시 생각했다. 사람의 표정에 모든 것이 담겨 있는데 마스크는 어쩌면 우리가 감추고 싶은 가면의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이 늦가을 바람만큼 시렸다. 어둠이 깔리고 주변은 형형색색 화려함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곧 크리스마스임을 알리는 장식들도 눈에 띄었다. 잠실은 내가 사는 ‘읍’보다 조금 더 빨리 시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때. 초저녁에 봤던 분주함은 사라지고 느긋한 움직임이 감돌고 있었다. 시간은 밤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앗, 익숙한 사람이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인사할 수 없는 사이다. 그 사람은 노숙자다. 수년 전에도 내게 와서 너무나 당연하게 “돈 좀 줘요.”라고 했던 사람. 그것은 구걸이 아니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구걸의 어투는 아니었다. 그 사람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행색을 하고 같은 무리와 함께 쌀쌀한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난 집으로 돌아가는 광역버스에 몸을 실었다.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는 책을 꺼내지 않았다. 이 밤, 거리에서 본 모든 풍경을 오래 느끼고 싶었다. 잠실역 환승 센터로 가던 길에 마주쳤던 연인의 모습, 길거리 노점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며 걸음을 재촉하던 중년의 남성, 그 시간까지 교복을 입은 채 잠실역 광장 기둥에 앉아 있던 여학생 무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듯 보이는 풍선을 든 꼬마를 안고 가는 다정해 보이는 가족, ‘마감 세일’ 푯말을 내걸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어느 마카롱 가게 사장부터 지하철 개찰구를 수리하기 위해 장비 가방을 내려놓던 젊은 기사님까지.
잠실역은 내가 떠나면 셔터가 내려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것이다. 비상 출입구를 가리키는 그림만이 그 빛을 뿜어내겠지. 그렇게 서울의 밤은 깊어졌고, 난 다시 ‘읍’으로 왔다. 조용한 밤거리가 내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