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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단 Oct 24. 2021

고인돌 선생님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고인돌은 하나다. 국사교과서에 자리 잡았던 거대한 고인돌. 북방식 고인돌이라 불렸던 ‘탁자식 고인돌’이다. 존재만으로도 거대하고 장엄하며 큰 경외를 주기 때문에 시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그것을 파헤쳐 부장품을 훔쳐가려는 사람들의 존재 또한 아주 많았지만, 이 거석을 옮길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존되게 되었다. 문제는 이 탁자식 고인돌은 고인돌의 수와 종류에 비하면 굉장히 일부분만 차지한다는 점이다. 자연히 탁자식 고인돌처럼 거대한 암석을 보고 환호한 이들은 그에 비하면 이른바 ‘남방식 고인돌’ 즉 바둑판식 고인돌이나 개석식 고인돌(지하에 무덤 방을 만들고 거대한 암석으로 덮은 형태)에서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는 일반인이나 연구자나 크게 다르지 않다. 




둘째로, 바둑판식 고인돌은 주로 구구 절절한 사연을 겪게 되는데, 탁자식 고인돌은 자체로 정통 의례용, 종교적 제례용, 우두머리의 묘 정도로 인식되지만, 대표급, 홀로 있는, 정말 용도와 예구가 발견된 바둑판식 고인돌이 아니라 그저 오종종 바위 더미가 무리지어있는 것 처럼 보이는 이 고인돌은 주로 지묘나 공동묘지로 여기거나 한다. 게다가 '바둑판식' 이라는 이름 탓에 네모 낳다는 편견이 생겨나 남방식 고인돌이란 표현과 더불어 더욱 오해를 사게 되었다. 지금은 기반식 고인돌 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같다. 잘 알려진 곳이 아닌 이상(연구와 관광 두 측면에서) 그런 곳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청동검, 거울이나 방울 등 청동제품, 유해나 관의 용도로 추정할 만한 것들이 나오는 게 아닌, ‘고작’ 돌칼, 화살촉, 토기 조각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한다. 


물론 대박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다. 몇 십년 전 고인돌 발굴 때 일이다. 한 막내 대학원생에게 연습용 삼아 덮개가 제일 손상된, 허접스럽게 생긴 고인돌을 맡기고 파게 했는데 거기에서 유해와 부장품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 일화는 곧 고고학사의 전설처럼 남았으며, 그분은 그것을 바탕으로 석사 하시고 이를 계기로 줄곧 관련한 연구를 하고 계신다고 들었다. 기반식 고인돌의 말로는 비참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것들은 시대별로, 용도별로 각종 석재료로 재활용되었다. 그림에서도 원형의 일련의 구멍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곳에 나무 말뚝을 받아 물을 주길 반복하면(계절을 걸쳐) 목재의 수축 팽창이 석재의 결에 힘을 가하기 때문에 그 원리로 인해 결국 바위가 부서지고 만다. 이또한 옛 사람의 기술로 최대한 네모지게, 혹은 예상한 형태에 가깝게 손을 대기에 암석은 결국 금이가 동강나게 된다. 이렇게 덮개석이 손상된 고인돌은 일단 가치를 잃는다. 아주 어마어마하게 거대해서 반으로 쪼개도 수 미터가 넘은 암석판이 남는 정도가 아닌 한.(물론 이 경우에도 크게 주목을 받진 못한다) 




이 고장 금산 북서부의 암석류는 주로 선캄브리아기부터의 흑운모편마암(고인돌의 주 재료중 하나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마그마의 관입으로 형성된 화강암, 특히 흑운모화강암의 종류가 많다고 한다. 다만 불행한 흑운모의 경우 결대로 쪼개지기 쉽기에, 많은 과거인들이 이를 잘라다가 다리도 짓고, 주춧돌도 놓고, 길을 만들기도 한 것이다. 심지어 여전히 덮개돌의 일부로 추정되는 종류들이 밭더미의 영역 표시용으로 굴러 다니기도 한다. 




천내리에 남아있는 12기의 고인돌은 1기가 개석식일 뿐 나머지는 그저 남방식 고인돌로 덮개돌만 언덕배기 정상에 반, 혹은 그 이상쯤 파묻혀있는 모습으로 있다. 게다가 오죽 자르고 부수고 싶었는지 각종 말뚝 흔적과, 그렇게 베어간 흔적들로 가득하다. 그렇지 못할 정도로 괴악하게 울퉁불퉁 삐쭉뺴쪽 난리나게 생긴 화성암을 제외하면 정말 반듯하게 생긴 평평한 덮개돌은 이미 누가, 누군가가, 계속 떼어가고 떼어가 마치 베어먹고 먹은 과일처럼 남았다. 그러니 일종의 지붕 흔적만 남은 숲속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운수 좋게, 처음 용화리 고인돌3기를 보았을 때 마침 지척에 묘소가 있어 ‘그래, 자고로 묫자리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겠지’ 하고 무덤가를 주로 뒤졌다. 아니나 다를까. 선산이나 묘소의 근처 외진 곳에 숨어 있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반드시 최초의 용도가 중요하다고만 여기지 않기 때문에, 이런 덮개돌, 쪼개진 덮개돌에서만 알 수 있는 이들의 기구한 팔자들을 생각한다. 과거 어느 시대의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은 훌륭히 가공된/가공될 재료로 보였을 것이며, 화강암을 깨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개석식 고인돌에서 알 수 없는 신비감이 느꼈을 수도 있고, 굄돌 밑에 무엇이 묻혀있을지 파보았을 수 있다.(나도 놀랐고 개석식을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높으신 분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 가공과 가공을 거쳐 만들어진 산물을 재가공해다가 바쳤겠지. 그래서 정말로 온전한 모습의 것들은 하나 없다.



게다가 각종 지의류가 이미 터전을 잡았다. 지의류는 단일 생물은 아니고, 아주 다른 조류와 균류(주로 곰팡이)의 공생체이다. 조류는 곰팡이와 광합성을 하며 공생관계를 이룬다. 그림에서 보는 흰색 둥근 점이나 원은 암석층의 가상지의류를 말하며, 녹색은 녹색조류algae의 활동으로 보면 된다. 이들이 석조문화재에 번식하면 관련 계열 공무 일환으로 청소와 소멸을 담당할 테지만, 이미 공기와 습기, 눈비와 바람에 노출된 이 초라한 덮개석들 에게는 이곳이 지의류와 각종 이끼와 낙엽의 낙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실은 이런 식으로 유명지가 아닌 곳의 고인돌들은 절대 학술적으로, 연구적으로 가치를 가질 수가 없다. 이유 불명, 위치 불명, 증거 불명, 원형 훼손 등 게다가 발견되었다는 화살촉이나 돌칼 등도 물리적 형태의 증거가 아닌 전승과 설화의 일일 뿐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 고장 사람들은 고인돌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저 ‘뒷산에 큰 바위들이 있다.’정도로 생각한다. 혹자는 그것을 일컬어 ‘팔선바위’라 여기며 신성하게 모셨다고 했는데 한 눈에 찾았을 때 고인돌은 9기였다. 역시 어떤 모자란 취급을 받던 친구가 8기에서 오래 전부터 제외되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전에 어떤 치밀한 연구가가 천내리 고인돌이 12기가 존재함을 밝혀내었다. 나는 이 연구자가 몹시 궁금했지만, 당시 논문이나 사료 수집 방식이 아날로그인 점 등을 고려하니 인터넷상에서 쉽사리 연구자를 확인할 수 없었다. 고장의 문화공보관광과와 해당 관련부서에 통화를 넣어도 ‘알 수 없다’는 답변만 나왔다. 고인돌 12기는 1995년에야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로 등재 되었는데 당시로 추정되는 사진에 의하면 그나마 12기의 존재가 작은 형태나마 알아볼 순 있었는데 그보다 17년 뒤인 이제야 갔을 때엔 이미 온갖 나무숲이 자라 아주 근처에 있는 몇몇만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곧 탐사가 시작되었다. 몇몇은 무난하게 찾았지만 그보다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것들은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길 없는 산길이 시작되었다. 나는 거미를 아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데, 빌어먹을 거미들이 온 산에 집을 쳐놨다. 거미줄도 끔찍하다. 그런데 산중 거미는 더욱 최악이다. 그것들은 내 얼굴에 부딪히면 끊어지는 게 아니라 훨씬 더 탄성이 좋고 질겨서 마치 가야금 줄 튕기듯이 딩~ 하면서 앞뒤 좌우로 움직일 뿐. 나는 노트를 세로로 들고 헤치며 나아갔지만 불쌍한 작은 노트도 끊지 못하는 튼튼한 거미줄이 덮쳐왔고, 거미는 손바닥 만큼 컸으며 집은 거의 평창동 저택 급으로 짓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우리 시골집에 있는 고작 배 빵빵한 노랑 거미가 아니라 배에 검정 줄무늬가 있는 종이라서 시각적으로 막대한 고통을 느끼며 고인돌 두 개는 더 찾았는데, 남은 놈들을 찾으러 산 중턱길을 두 번 내려가고 산을 빙 돌았다. 그리고 그 거미들의 이름을 알려주기 위해 수십장의 거미사진을 찾으며 다시 고통을 느꼈다. 시골집에 사는 평범한 노랑 거미는 호랑거미이고, 산에서 만난 커다란 줄무늬 노랑 거미는 긴호랑거미이며, 감히 용안을 쳐다볼 엄두도 못내는 면상을 가야금 줄처럼 퉁겨나가게 하는 집을 만드는 거미는 무당거미이다…. 사진은 실을 수 없고 궁금하신 분이 직접 검색해보시는 것을 권한다.




좌로는 거미떼 거미집 우로는 가시나무를 헤치며 돌다가 원점으로 돌아와, 결국 이 곳의 고인돌의 유형을 살피면 분명 근처에 숨겨져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산을 더 둘러보는 게 아니라 돌아온 길을 되짚으며 이번엔 다른 관점으로 보았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사람이 오가지 않는 덩굴 수풀 너머에 우연찮게 돌 끝이 보였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낸 10기, 그러니까 위치상은 5-6기 근처에 있었던 선생님이었다. 일단 허리춤만한 덩굴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덮개석 위에는 면적을 가늠할 수 없이 켜켜이 각종 잔재와 낙엽이 쌓여있었다. “이건 껌이지!” 하고 준비한 3M 장갑으로 정말, 정말 조금 휘저어 걷었는데 순식간에 그곳에 살던 모든 벌레들이 갑자기 벗겨진 세상에 기겁하여 튀어나왔고, 나는 더 기겁하여 장갑을 던지고 뒤로 물러났지만 장소가 협소해 빠져 돌아갈 곳이 없었다. 순간 든 두 가지 생각. 이대로 포기한다. 이대로 가보자고. 나는 골동품상에서 조선불상을 우연히 얻게 된 기이한 이야기를 되뇌며 벌레 터전을 모두 발로 밀고 덩굴을 치우고 장갑쥔 손으로 퇴적물이 된 유기물들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발견하게 된 분이 이 선생님이다. 







선생님의 일부가 보이십니까?

선생님의 형태



그렇게 10기를 찾아내고, 다른 선산을 조금 가보았으나 역시, 놓여진 곳의 유형이 있어 다른 방향으로 가거나 더 멀리에 있을 것 같진 않고, 그것이 소실 되었거나 묻혀있기 때문에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17년전 고작 충청남도 문화재로 등재되는 수준임을 고려해, 검색 하더라도 이전부터 일대의 고인돌을 연구하는 이를 알 수 없으며, 가장 중요한(사실 서두에 적어야 하는)내 자신의 고인돌에 대한 지식도 매우 한정적이며 거의 없다는 것으로 판단을 내리며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까지 정확히 50분 걸리더라. 가는 길에 산 중턱의 암벽을 열심히 파헤치는 세 대의 포크레인이 있었고, 도로에서 한 분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어서 길을 재확인할 겸 물었다. 



“선생님 용화리로 가려면 이쪽으로 계속 가면 되지요?” 


“걸어가실거요?”


-무전기를 켜고


“아, 아, 반장님 여기 보행자가 하나 지나갑니다”


“뭐라뭐라 안들림”


“반장님요! 여기예! 보행자가! 한 분 지나간다구요!”


-다시 나를 보시더니


“예 벽면으로 빠짝 붙어서 가이소”


“예 선새임 감사함니다”



그래서 가벽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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