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내 몇가지 원칙 중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
1. 오빠라는 호칭을 쓰지 않기
2. 언니라는 호칭을 쓰지도 받지도 않기
3. 누나라는 호칭을 받지 않기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뭐라고 부르냐, 보통은 대학용 이름을 하나 짓는다. 별명 같은 것, 그리고 이를테면 존대를 해야하는 경우 "리단, 이런건 어떻게 해요?" 라고 존대로 말하되 명칭에 존칭을 더하지 않는 식으로. 대표급 교수가 그렇게 행동했으니, 밑으로도 비슷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그 외에는 죄다 친구나 친구비스무리가 되어 어울렸다. 존대를 하든 반존대를 하든 반말을 하든 하고싶은 대로 하면 된다. 나는 이 물에서 2년 정도 놀다가 학점을 채우러 탕아처럼 본 학과로 돌아갔는데 여기 문법은 더욱 고지식하여 그때 당시에도 바로 그 '학형' 이란 말이 오가던 곳이었다. 서슴없이 친구를 먹으면 알다시피 그때부터는 이름 석자 부를 일이 별로 없다. '야', '너' 로 시작하거나 주어가 없어도 서로 친하다. 그건 마찬가지였는데 어김없이 오빠,언니가 덮쳐왔다. 나는 언니라고 불리는 게 마땅치 않고 윗사람노릇에 진력이나 첫 소속을 버렸던 전적이 있다.
내 별명은 이미 널리널리 알려졌지만, 본 과에서는 정식 이름으로 불렸다. 우리는 과별 활동이 제법 있고 매학기 실시하는 답사는 모두들 심기일전하고 갔다. 그리고 나 또한 학점 채우려고 여기 돌아온 게 아니라 공부하려고 온 것이니만큼 진지했다. 나는 XX(본명)선배가 되었고 그렇게 불렸다. 거리가 그보다 가까워지면 별명을 권했지만 선후배 거리를 유지하려는 이들은 나만이 아니어서 언제나 모두 친구인 것은 아니었고, 그 미묘한 거리감이 신경쓰이거나 불편하지도 않았다. 과에서 학생회를 하진 않았지만 학생회 친구들과 친했다. 그리고 그들은 답사를 도맡아 준비했고, 조장 맡길 인물 물색은 매우 중대한 사항이었다. 경북 답사에 80명이 인당 8천원으로 (되도록 맛있게)밥먹을 수 있는 식당 찾기만큼. 나는 4번 답사에 갔고 그중 총 3번을 기꺼이 조장을 맡았다. 답사에서 친구를, 일화를 많이 만들었다. 한번은 다른 대학 사학과와 시비가 붙어서 양쪽 학생회가 총출동해서 대면하여 뭔가의 총집산을 넣고 만든 벌주 마시기 내기가 되었다. 망했다. 종목은 우리가 술게임을 잘 몰랐으므로(당시 회장은 아주 사슴같은 사람이었다) 무식하게 가위바위보를 했고 마지막에 이 사달의 주도자인 모 씨가 이기며 그들이 그 참치에 마요네즈에 뭐에 저에 섞은 술을 영웅호걸처럼 마시는 것으로 해프닝이 끝났다. 나는 학생회 소속이 아니었음으로 눈총을 받고 끝났지만 절반 주도했던 이의 생사는 상상에 맡기겠다.
선후배는 너무 편했다. 난 단지 나이 많은 남성과 여성을 부르기 위해 선배라고 말했다. 그건 요즘 주민센터나 공무 민원을 보러가면 모두 선생님 선생님 하는 것과 무게가 비슷했다. 그들이 배움과 인생을 선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날 좀 숨기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오늘 학과 후배를 만났다. 그는 대학시절에도 그리 외향적이지 않았고, 대화를 많이 나누었던 기억보다 그가 있던 장면들. 그가 정렬한 필기구의 모습. 그가 강의하는 교수를 바라보고 있을 때의 느낌. 답사에 가서 멀찍이서 약간 미소짓던 그런 것들이 장면으로 기억났다. 그는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대신 우리는 많은 수업을 함께 했다. <초고는 완고다>에 나온 픽션쓰기 중간보고서 수업에서 그는 3등을 했었지. 그래. 10년만이었다. 여전히 나를 선배라고 부른다. 대신 그 음성에서는 내가 선배라고 부르는 것과 다른 무게감이 느껴진다.
후배를 남기지 못했다는 것은 깊이 잠겨있는 후회 중 하나이다. '전달''전승'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지만, 실제로 그럴 인물을 만나면 그를 친구로 만들어버린다. 거리 조절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대학시절의 쇠락을 이야기했다. 우리 과의 전설 교수가 전국에서 뽑이온 진달래 군락이 밀린 것을 생각하며 미로같던 공사장을 돌던 학생들이 떠오르고 이내 지금은 겉은 멀끔한 학교를 상상했다. 우리가 누렸던 문화는 단절되었고, 지금의 대학생들은 결단코 우리와 누리는 경험 자체가 다르다. 그렇다고 낭만적인 대학시절을 보낸 이들이 잘났냐? 그건 아니다. 다들 우울증이고, 간신히 살고 있고, 많은 곳으로 흩어졌고 기꺼이 대학시절의 변화와 경험을 던졌다.
물론 나도 '선배'가 있다. 진짜 의미의 선배. 친구는 넘을 수 없는 그 절대적 간극. 그렇다고 내가 그의 후배냐, 그게 못 되는 것이다. 어쨌든 개떡을 반쯤 넣어 아무 조모임에 나이많은 남자가 있으면 선배선배 라고 했는데, (오빠오빠라고 할 수는 없잖은가?) 개떡의 후배후배로 어떻게 남는가. 내가 모시는 선배도 나를 친구나 동료로 대하지 후배로 대하지 않아 사실 나는 후배의 역할을 모르겠다. 몰랐다고 할 수 있겠다. 아니 오늘까지 몰랐다.
그는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나는 내 시에 나오는 파록이 딱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각종 필살기(약 이름 맞추기, 공작새처럼 뽐내기, 미공개 글 보여주기, 기억나는 일화 줄줄 말하기)를 최대한 생략하고 진중하게 대하며 생각했다. 이것이 선배구나. 이런 무게구나. 말을 많이 골랐다. 그는 몇 번 내가 한 말을 되뇌었다. 나는 위로도 공감도 못한다. 자살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면 자살에 대해 같은 이야기를 하고, 단약에 대해 말이 나오면 단약경험을 말하거나 들을 뿐.
그를 바래다 주며 친구들에게 성별을 가리지 않고 으레 하듯 포옹을 하고 악수를 했다. 다음에 또 만나기로 했다. '다음' 이라지만 그의 기약이다. 나는 얼마나 경박한 허풍선이 건달인데 말이지, 친구로 휘말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그런 종류인데 말이지, 그렇구나. 네가 내 첫 후배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