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_나이는 상관없다

로그로뇨에서 나헤라(Nájera)까지

by 마감인간
일관실기 첫 번째 프로젝트는 '발끝따라걷기' 2014년 11월 6일부터 12월 9일까지 스페인 순례길 산티아고길을 33일간 걸었다. 아주 뒤늦게 스페인 팜플로냐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걸으며 썼던 기록을 정리해본다.

아침 7시 10분에 출발해서 오후 2시 55분에 도착했다. 총 30km를 걸었다.


이미 길을 걸은 사람과 이제 곧 길을 걸을 사람들은 '사람'에 대해 말하거나 기대한다. 나도 길 위에서의 인연을 내심 기대했다. 워낙 걷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나는 나와 걸었다. 새벽에 길을 나서면서도 30km의 압박이 컸다. 어쨌든 길을 새벽에 길을 나섰다. 안개가 자욱했다. 영화 <구름 속의 산책>이 떠올랐다.


IMG_5951.JPG 점으로 보이는 찰스 아저씨.


"Who am I?"


며칠 전 길을 걷다 몇 번 눈인사했던 찰스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아저씨는 나에게 같이 걷자고 했다. 경계심이 들었지만 '컹컹'거리는 웃음소리에 안심했다.(근거없는 믿음.) 찰스 아저씨는 미국 동부 해안가 어느 작은 도시(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에서 산다고 했다. 직업은 목수. 50대 초반 언저리로 보였는데 유럽에 여행온 게 이번이 처음이고, 그 처음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했다. 아저씨의 자제 분들은 이미 독립했고, 자신은 얼마 전 이혼했다고 한다. 자신이 누군인지 알고 싶다는 아저씨. 나이와 상관없이 비슷한 고민과 비슷한 무게로 어깨에 지고 길을 걷는다는 걸 알았다.


찰스 아저씨는 나와 호흡이 잘 맞는 사람이었다. 내가 개떡같이 영어로 말하면 아저씨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아저씨의 노고에 감사) 다른 사람이라면 내 질문을 되물었을테지만 찰스 아저씨는 바로 답변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대화의 진척이 순조롭게 이어지는 몇 안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스페인어 실력도 매우 짧았지만 아예 스페인어 자체를 못하는 찰스 아저씨에게 나는 '3개국어 가능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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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나에게 스페인어를 배웠다.


"이건 무슨 색이야" "Verde(초록)"

"손은 스페인어로 뭐야" "la mano, las manos"(두 손을 휘휘 흔들었다)


거의 옹알이 수준으로 스페인어를 나눴다. 찰스 아저씨는 길을 걸으며 엄청 크게 따라했다. 그러다 자기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혓바닥을 내민 뒤 호탕하게 웃었다. 아저씨는 컹컹거렸다. 뭔가 바보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나도 덩달아 소리내어 웃었다. (평소 소리내어 웃지 않는다는 걸 잠시 깨달았다) 찰스 아저씨는 웃다가 다시 정색하며 진지하게 이야기하다 다시 옹알이 스페인어 배우기를 반복했다.


IMG_5961.JPG Navarette 마을 입구


이 곳은 나바레떼 소도시. 이른 아침이라 할머니가 동네 빵집에서 할머니가 바게뜨를 사서 들고 갔다. 길을 걸을 때 빵집이 없는 작은 마을도 꽤 많이 지났다.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사시나 했는데, 'Pan(빵)'이라 쓰인 흰색 봉고차들이 일정 시각마다 사이렌을 울리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럼 무조건 빵을 샀다. 무엇이든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그 봉고차도 평생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 빵을 사먹었다.(빵순이가 되었다)


IMG_5963.JPG 찰스 아저씨가 커피를 사줬다.


찰스 아저씨는 이후로도 길 위에서 가끔 만났다. 영어를 못할수록 정말 핵심을 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면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말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언어에 덧입히는 느낌도 든다. 한국어로 말한 솔직함이 때론 덜 솔직하다. 이유가 따라붙고, 가능성이 따라붙고, 우회하는 변명이 따라붙고. 찰스 아저씨가 물었다.


"앞으로 뭐하고 싶어?"

"(망설이다가) 글 쓰고 싶어요."


스스로 오글거림을 느꼈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컹컹.


IMG_5977.JPG 그렇게 찰스 아저씨와 30km를 걸어 나헤라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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