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헤라에서 산토 도밍고까지(Santo Domingo)까지
일관실기 첫 번째 프로젝트는 '발끝따라걷기' 2014년 11월 6일부터 12월 9일까지 스페인 순례길 산티아고길을 33일간 걸었다. 아주 뒤늦게 스페인 팜플로냐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걸으며 썼던 기록을 정리해본다.
새벽 7시 30분에 출발해서 오후 1시 50분에 도착했다. 총 22km를 걸었다.
산토 도밍고로 떠나기 전날 밤 알베르게 풍경을 올려본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다음 알베르게에 머물면 운이 좋으면 만났던 사람을 또 다시 만나고, 그 다음 알베르게에 가면 재차 못 만났던 사람을 다시금 만나는 일이 꽤 많았다. 아침에는 다들 쿨하게 자기 갈 길을 가니, 언제 다시 만나나 하는 마음이 들다가 사나흘 있다가 본 사람도 있다.
나에게 반가운 사람들이다. (초상권 침해일텐데. 문제 생기면 삭제해야겠다.) 보고 싶네. 파스타계의 홍명보, 리베로 아저씨도 보이고, 같이 커피 한 잔 마신 얀도 보이고. 어쨌든 다들 같은 길을 걸어왔으니, 그리고 와인이 매우 저렴하니까 저녁에는 마음이 맞으면 옹기종기 모인다. 각자 걸어왔지만 한 곳에 모여 앉아있는 게 어색하지 않다.
판타지 vs. 현실
길을 걷는다는 건 하나의 판타지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막상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현실이다. 어쨌든 몇 십명 규모의 알베르게에서라면 나름 지켜야할 규칙도 따라야하고, 어느 자리에서 잠을 자야 숙면을 취할 수 있을 지 가늠하게 된다. 인생 목표, 삶의 가치,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어후, 어제 잠 못 잤어. 누가 엄청 코 골더라"
"맞아. 번개치는 줄"
"이렇게 골았지. (흉내내며) 그르르러러렁"
나헤라 알베르게에서 길을 나설 때 몸이 무거웠던 것도 바로 '코고는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코를 많이 골 것처럼 보이는 분들을 피해 안쪽 침대 자리에서 짐을 풀었는데, 웬걸 동서남북 사방에서 코골이 오케스트라. 귀막이도 해보고, 이층침대를 발로 차보기도 하고, 침낭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음악을 들어보기도 했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를 어쩌랴. 내 귀를 탓할 수밖에.
똘똘이 아저씨가 이번 숙소에 머물지 않았던 게 아킬레스건이 된 셈이다. 똘똘이 아저씨는 나의 무거운 발걸음과 달리 수평 에스컬레이터를 타듯이 유유히 걸어다니는 아일랜드 신사. 항상 등산복 바지 주머니에 산티아고길 가이드북을 넣고 다녔는데 나를 보면 그 책부터 펴들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줬다. (나도 길 아는데.) 그리고 똘똘이 아저씨는 알베르게에서 침대에서 짐을 풀려고 하면 '누구, 누구를 피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코 고는 분들을 콕콕 짚어냈다.
결과적으로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렸다. Albergue Santo Domingo Casa del Santo에 도착하자마자 발꿈치에 잡힌 물집 두 어개를 터뜨렸다. 예전에 까미노 관련 카페에서 정보를 찾아볼 때 물집에 대한 걱정 글들이 참 많았다. 나 또한 무언가 '엄청'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에선 물집을 소독한 바늘로 터뜨리고 약바른다. 약간 아프면 참는다. 여기서도 판타지와 현실의 간극은 존재하나보다.
#돌이켜보니
당시 여행자 혹은 순례자의 시선이기 때문에 모든 걸 여유있게 바라봤을테지만 그러한 부분을 감안한다 해도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삶의 빈 공간들이 있었다. 빈 시간이 있었다. 나이가 적든 많든 간에 시간과 공간의 주인인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단지 개인의 태도인 건지, 환경적 영향을 받은 건지. 아마 이런 생각이 떠오른 건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어떠한 틈도 없다는 건가. 현실의 바닥을 저벅저벅 걷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