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_사고는 도처에 있다

벨로라도에서 부르고스(Burgos)까지

by 마감인간
일관실기 첫 번째 프로젝트는 '발끝따라걷기' 2014년 11월 6일부터 12월 9일까지 스페인 순례길 산티아고길을 33일간 걸었다. 아주 뒤늦게 스페인 팜플로냐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걸으며 썼던 기록을 정리해본다.


오전 8시에 출발해서 낮 12시 15분에 도착했다. 총 21km를 걸어야 했지만 부르고스까지 5km를 남기고 어떤 아주머니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아침부터 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알베르게에서 잠을 푹 자고 길을 나섰지만 길이 험했다. 아스팔트로 된 국도를 따라 걷는 게 오히려 산길보다 힘들게 느껴졌다. Alto Cruceiro(1080m)는 돌산이었다. 아스팔트 길이 힘들다 싶었는데 돌산을 오르니 돌산이 힘들다. 그냥 전반적으로 다 힘이 드나 보다 했다.


팟캐스트 들으니 걸음이 가벼워졌어요


팟캐스트. 길을 걸으며 많이 들었다. 심심해서, 혹은 걷고 있다는 걸 잠시 까먹기 위해서 들었다. <탁PD의 여행수다>에서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벙커1특강>에서는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씨 강연을,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는 흑임자의 말장난을, <뫼비우스의 띠지>에서는 백시인의 급진적인 발언을 들으며 걸었다. 자연을 바라보고, 길을 걸으며 사색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의 산티아고 길이지만 뭐 없다. 지겨울 때 있고, 피곤할 때 있고 그렇다.




강.력.추.천.


1. <탁PD의 여행수다> 오세아니아의 캠퍼밴의 제왕

비 올 때 들으면서 걸었는데 위로가 된 프로그램. 돌덩이를 스틱으로 뚫을 듯이 찍으며 산을 탔는데 캠퍼밴 제왕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걷고 있는 시간이 감사했다. 그러면서 캠퍼밴을 꿈꿨다.


2. <벙커 1 특강> 패션큐레이터 김홍기 특강

패션에 대해 쥐뿔도 모르지만 패션에 얽힌 에피소드나 역사는 늘 흥미롭다. 김홍기 님은 유명 브랜드 잡지의 에디터 글들에 대해 꼼꼼하게 따졌다. 언어의 본질과 의미를 퇴색시키는 남용. 이런 것에 되게 민감했다. 아는 것도 많지만 말로 풀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러면서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다시 보고 싶어 졌다.


3. <이동진의 빨간 책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빨책의 전성기는 초창기(1년)였던 것 같다. 문학을 다루는 방송분을 들을 땐 나도 뭐라도 한 마디 보태고 싶은 심정이었다. 흑임자 김중혁 작가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그의 목소리를 통해 배웠다. 그러면서 자꾸만 글이 쓰고 싶어 진다고 일기를 썼다.


4. <뫼비우스의 띠지> 이름이 뭐예요, 전화번호 뭐예요

마음을 다해 들었던 팟캐스트. 바갈라딘, 오라질년, 백시인의 찰떡같지 않은 궁합이 나와는 찰떡궁합이었다. 출판계의 비하인드 스토리, 톰과 제리 같은 말재간에 삐걱거리는 무릎의 통증을 잠시 잊었다. 특히 백시인의 전방위적인 발언들을 좋아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남자. 하지만 사장님을 우러러보는 남자. 그는 시인. 그러면서 어떤 방식으로든 책을 만들고 싶어 졌다.


P20141116_092042089_54367D8E-8156-4087-8BCA-22C977E2283F.JPG 우중충하다


사고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신나게 팟캐스트를 들었다. 한국인 찬과 함께 걸었는데 내리막길 저 멀리 짙은 회색 연기 구름이 뭉쳐 있는 게 보였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스팔트 갓길을 가다 보니 정말 저기로 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연기가 피어오른 게 보였다. 불이 났나. 길 반대편에서 오던 승용차가 멈춘다. 그리고 우리를 부른다. 스페인 아주머니가 '톡시컬(toxical)'이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주머니가 어디로 가냐고 해서


"Burgos(부르고스)"


아주머니는 선뜻 차에 태워줬다. 큰 화재가 나서 유해가스로 도시가 통제된 상태라고 했다. (섬유 공장 화재 사고) 마스크 없이는 다닐 수 없다더니 정말 승용차에 타서 창 밖을 보니 모두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렸다. 도로도 차량이 통제된 상태였다. 아주머니는 우리를 부르고스 대성당까지 데려다 줬다. 훗. 이러려고 내가 이런 걸 샀나. 배낭에서 주섬주섬 '복주머니'를 꺼내서 선물로 드렸다. 복주머니를 사가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다음엔 복주머니 열 개 사가야겠다.


"buena suerte(Good luck)"


P20141116_123104423_87CA1B62-45C9-4649-9F8E-D7B2F2D37129.JPG 부르고스 대성당. 많은 걸 읽었으나 다 까먹었다.


Albergue Municipal de Burgos 5유로. 길 위에서 머물렀던 알베르게 중 시설 면에서 베스트였다. 현대적이다. 물이 잘 나오고, 침대가 깨끗하며, 사적 공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식물박사 호세 아저씨를 다시 재회한다. 호세 아저씨도 "여기 알베르게가 가장 좋아"라며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며칠 간 못 봤던 자아 찾는 찰스 아저씨, 똘똘이 아저씨, 독일 친구 얀, 모두 이 곳에서 다시 만났다. 만나서 반가움을 표한 뒤 다들 양말과 속옷을 빨기 위해 흩어졌다. 나는 자판기 커피를 뽑아마셨다.


#돌이켜보니


도시를 찍으며 걷다 보니 도시 관광을 많이 할 것 같았는데 실제 그렇지 않았다. 체력이나 취향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거의 잘 돌아다니지 않았다. 도시를 들르면 여행자도 아니고, 거주자도 아닌 애매한 경계선에 있다고 해야 할까. 사람들도 숙소에 도착하면 다들 짐 풀고, 빨래하고, 건조기에 빨래를 돌리기에 바쁘고, 발가락의 물집을 터뜨리거나, 아니면 끼리끼리 모여서 와인을 마신다. 도시를 잠시 떠돌다가 좁은 침대로 돌아와 내일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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