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_개 천사님을 만나다

벨로라도에서 산 후안 데 오르테가(San Juan de Ortega)

by 마감인간
일관실기 첫 번째 프로젝트는 '발끝따라걷기' 2014년 11월 6일부터 12월 9일까지 스페인 순례길 산티아고 길을 33일간 걸었다. 아주 뒤늦게 스페인 팜플로냐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걸으며 썼던 기록을 정리해본다.


새벽 7시 50분에 출발해서 오후 4시 30분에 도착했다. 총 29.1km를 걸었다.


지금까지 매일 걷던 시간과는 현격한 시간 차. 그만큼 '빅 데이'였다. 이 날은 걸었던 날들 중 가장 힘이 부친 날 중 3순위 안에 들지만, 합리화 기제, 과거 미화 때문인지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기 하다.


"오늘은 그야말로 '빅 데이'였다. 아침부터 계속 비 내리더니 맞바람까지 불었다. 방수되지 않는 장갑이라 젖은 지 오래이고 에어로빅 토시도 빗물에 젖었다. 물론 등산화도 흠뻑 젖어서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 물이 고였다 빠졌다 하길 반복했다. 쌀쌀한 날씨라 모든 걸 그만 두고 싶었다."


망토 우의에 내리치는 빗소리만 들으며 저벅저벅 걸었다. 투둑. 투둑. 투둑. 눌러쓴 볼캡 챙에는 물방울이 대롱대롱 맺혔있다가 떨어졌다. 쏴아.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불현듯 내가 산길을 걷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네. 노란 화살표를 잘 따라온 게 맞겠지. 산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나무에 노란 화살표가 그려져 있거나 표지판이 있는데 비가 내리는 날에는 어떤 표시라도 놓치기 쉽다. 장대비에 바람이 더해지자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하얀 물거품이 일어났다.


비로 부예진 숲 속에서 개 천사님이 나타나다


'춥다', '언제 도착하지'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을 때 어디선가 개님이 나타났다. 개님은 비를 쫄딱 맞아서 볼품없어 보였다. 길에서 개를 많이 만나서 으레 이 개님도 스쳐가겠거니 했는데 자꾸만 나를 따라왔다. 그러다 나보다 앞서서 몇 발자국 가다가 뒤를 돌아보고, 또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본다.


'저 개 뭐야'


산길이라 언덕을 내려가고 올라가길 반복하는데 이 개님은 도통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안경에 서리가 끼고 배낭이 무거워 잠시 발걸음을 멈추면 개님도 멀찌감치 비를 맞으면서 서 있었다. 갈림길이 나왔을 땐 왼쪽 길에 서서 기다렸다.


"비 와, 집에 가"


그래도 따라온다.


'아, 스페인 개님이지. 스페인어를 알아듣나'


떠오르는 말은 'Volver'(돌아가다 동사)밖에 없었다. 그 짧은 순간 '명령형 변화형이 뭐였더라'는 생각도 했다.


"볼베르! 볼베르! 뚜 까사(tu casa, 너네 집)"


P20141115_122653374_A3CB1733-E5EC-4C61-AE9F-36552D9F4128.JPG 개천사님.


P20141115_122655906_19D57978-4090-48AE-B304-669844406233.JPG 개천사님 사진은 두 장 올려야지.


생각보다 너무 멀리, 거의 이십 분 넘게 나를 따라와서 어서 집에 가라고 손짓했다. 어느 정도 산길을 벗어났을 때 개 님이 내 앞에서 잠시 머물더니 앉았다. "길 알려줘서 고맙다"라고 말하며 배낭 앞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서 주려고 했는데 웬걸 내가 이미 다 먹어버렸다. 야속한 배. "안녕"하고 말했더니 신기하게 "멍멍"했다. 이런 게 교감인가.


거짓말처럼 장대비가 잦아들었다. 다시 터벅터벅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부예진 숲 길을 따라 개 천사님이 총총총 걸어가고 있었다. 순례자들을 많이 마주쳤고, 길을 알려줬나 보다.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천사들이 함께한다는 말을 그저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개 천사님을 만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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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똘이 천사님을 다시 만나다


숲길을 벗어나니 저 멀리 어디서 본 듯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아일랜드 똘똘이 아저씨. 아저씨가 우연히 뒤를 돌아봤을 때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다시 걸었다. 걷는 속도가 늦어 아저씨 뒷모습이 보일 때도, 안 보일 때도 있었다. 갈림길이 나올 땐 어김없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똘똘이 아저씨는 내가 걸어오는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기다렸다가 '이 쪽 길이야'라고 확인시켜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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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니

개 천사님과 똘똘이 천사님이 길을 안내하듯이 혼자 선택을 하지만 선택을 하는 데까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오로지 나만의 선택인 듯 보이지만 과정상 주위 사람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회사를 그만둘 때 부모는 가타부타 말씀하지 않으셨다. 회사에서는 사표 대신 장기 휴가를 권했다. 어쨌든 이래저래 신경이 쓰일 법도 했는데 동료들은 스페인 가이드북을, 몇십 유로를 떠나는 선물로 건넸다. 선택은 온전한 전유물이 아니다. 이렇게 진지한 마무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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