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니요스델까미노에서 까스트로헤리스(Castrojeriz)까지.
일관실기 첫 번째 프로젝트는 '발끝따라걷기' 2014년 11월 6일부터 12월 9일까지 스페인 순례길 산티아고길을 33일간 걸었다. 아주 뒤늦게 스페인 팜플로냐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걸으며 썼던 기록을 정리해본다.
아침 7시 40분에 출발해서 오후 2시에 까스트로헤리스에 도착했다. 총 21.2km를 걸었다.
알람도 알람이지만 새벽에 손전등 불빛에 깰 때가 있다. 이르게 준비하는 사람들은 새벽부터 분주하다. 몇 십명 씩 함께 자는 공간에서 불을 켜긴 애매하기 때문에 휴대폰 라이트, 손전등을 켜고 준비한다. 조심스레 손전등을 켠다고 해서 편히 자긴 어렵다. 부스럭부스럭 비닐주머니를 묶고, 슉슉 옷을 갈아입고, 침낭을 개키고 넣고 하는 소리가 고스란히 들리기 때문이다. 잠 잘때 소리에 예민한 편이라 부스럭이 들리면 잠은 다 잔 거였다.
헤드라이트가 사고 싶었다. 샤스키아는 청소년에게 다양한 교육을 지원하는 NGO에서 일했는데 사랑스럽게 웃는 친구였다. 나중에 얼굴에 배드버그에 물려 울긋불긋을 넘어, 울퉁불퉁해지는 상황에 이르러서도 어깨를 으쓱하고 넘기는, 독특하게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다니던 친구였다. 샤스키아는 밤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책을 읽었다. 자기만의 세계가 확실한, 마음이 따뜻한 친구.
이 후로 등산용품에 관심이 갔다. 한국에서 대형 배낭을 살 때 오케이매장에 갔다가 너무 필요한 물건이 많아서 놀랐다. 블랙홀이었다. 멋스럽지 않아도 실용으로 중무장한 다양한 물건들은 '필요하지!'라고 연대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나에게 패션의 완성보다 실용의 완성이 매력적이었다. 길을 걸을 때마다 등산용품점을 들르면 사고 싶은 게 많았다.
가을과 겨울 사이 까미노길 무얼 가져갔나.
1. 침낭:가볍고 따뜻해야 한다. 라이너 뭐뭐 이런 것도 물어보던데 없어도 괜찮았다.
2. 배낭: 걷기 전에 여행해서 50리터 가방 그대로 사용했다.
3. 배낭커버: 장대비가 자주 내려 배낭 젖으면 낭패.
4. 판초우의: 스페인 Quechua 1만2천원. 강바람에 날려 불편했다. 걷기 어렵다. 나중에 포르투갈길 걷는 분에게 드렸다.
5. 바람막이 자켓: 스페인 Quechua 8만원. 자켓과 후리스 분리형.
6. 등산스틱: 걷기 전 머문 마덕리알베르게에서 얻어갔다. 까미노 끝나고 다른 알베르게에 기증.
7. 유니클* 다운점퍼: 침낭처럼 쑤셔넣기 좋은데 숙소에서 주로 입었다.
8. 상의&하의: 각 3벌 정도. 상의는 긴팔셔츠(스포츠웨어 아님), 하의는 바지 레깅스
9. 속옷&양말: 양말이 얇아서 중국 잡화점에서 짝퉁 나이키 양말 4켤레 샀다. 3유로.
10. 슬리퍼: 집에 있는 쪼리 가져갔다. 유용하다. 하지만 발 시렵다.
11. 세면도구 및 화장품: 칫솔, 치약, 샴푸&바디워시 사용 가능한 LUS* 비누, 스포츠타올 2장, 화장품, 썬블럭
12. 볼캡: 안경을 끼는데, 비오면 답없다. 모자 쓰면 그나마 덜하다.
13. 책, 다이어리, 필기도구
14. 아참, 중등산화 신었다.
15. 복대같은 주머니: 걸을 땐 자켓 안에, 잠잘 땐 침낭 안에, 씻을 땐 비닐봉지 안에 24시간 함께. 물아일체.
16. 손전등: 필요없다. 휴대폰 조명 쓰면 끝. 다만, 헤드라이트는 탐났다.
걷다보니 이걸 가져갈 걸.
1. 스패츠: 레깅스를 신다보니 등산화 사이로 자꾸 돌들이 점프점프. 정말 사고 싶었다.
2. 우의용 바지: 판초우의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 똘똘이 아저씨는 우의 바지를 입고 슉슉 걸었다.
3. 선글라스: 안경을 써서 선글라스를 잘 쓰지 않는데, 햇빛 쨍하면 눈부시다.
4. 맥가이버칼과 락앤락: 오이, 과일, 치즈를 넣고 다니고, 잘라서 먹으면 편하다.
단,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 수 있다.
1. 스패츠: 중국 잡화점에서 발토시를 샀다. 돌은 막을 수 있어도 비오면 다 젖는다.
2. 우의용바지: 판초 우의로 견딘다.
3. 선글라스: 눈부시면 모자쓰고, 고개를 숙인다.
4. 맥가이버칼과 락앤락: 과도는 빌려쓰고, 대충 싸서 비닐봉투에 넣어 꽉 묶는다.
아래 알베르게 옆에는 오래된 등산용품점이 있다. 오랜만에 재회한 찰스 아저씨와 들어가봤다. 먼지가 쌓인 제품들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거들떠보지 않을 심지어 고물처럼 보이는 용품들을 보물찾듯 뒤졌다. 스패츠를 정말 사고 싶었는데 비싸서 관뒀다. 대신 아저씨 스포츠웨어 셔츠를 골라드렸다. 계산은 아저씨가 했다. 그리고 동네 작은 바에 가서 맥주를 동네 아저씨들이랑 마셨다. 아저씨들은 남한에서 왔냐고 물었다.
#돌이켜보니
얼마 전 자의는 아니었지만 힐링워크샵에 참여했다. 선생님의 지침에 따라 이런저런 과정을 겪고 나자 나의 유언이 탄생했다. 내가 원하는 단어들, 나도 모르게 끌리는 단어들을 조합하고 나니까
"사랑하며 평화롭지만 원하는대로 살았다"고 적었다. 선생님이 말했다.
"여러분이 적은 유언에 속하지 않는 말들, 환경에 휘둘리지 마세요. 저 말을 꼭 붙잡고 선택하고 나아가세요."
산티아고길을 걸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걷기 열풍'에 발을 담갔다. 유행에 따르면, 열풍에 동참하면 스스로 없어질 것 같다는 불안에 늘 꺼려하고, 의심하고, 서 있었다. 그래서 산티아고길을 걸으면서도 걷고 나서도 '결국 해냈다'가 아닌 '결국 해버렸네'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해 산티아고길을 유언 속 단어 하나 하나를 빗대어보니 비껴나감이 없다.
괜찮았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