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_뫼비우스의 띠지

산 마르틴에서 아스트로가(Astroga)까지

by 마감인간
일관실기 첫 번째 프로젝트는 '발끝따라걷기'. 2014년 11월 6일부터 12월 9일까지 스페인 순례길 산티아고길을 33일간 걸었다. 아주 뒤늦게 스페인 팜플로냐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걸으며 썼던 기록을 정리해본다.


아침 8시 10분부터 오후 2시 10분까지 총 26km를 걸었다.



이 날의 기록은 이렇다.


"무릎이 또 말썽이다. 다행히 데이빗이 준 약을 먹었는데, 물이 없어서 침을 모아서 약 한 알을 삼켰다."

"그리고 혼자서 20km가량 걸었다. 오솔길을 걷고, 젖소를 봤고, 십자가 옆에서 셀카를 찍고, 순례자를 위해 먹거리를 내놓고 허허벌판에 사는 이를 만났다."

"아스트로가에 도착했다. 가우디가 만들었다는 성당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 이들과 맥주를 마셨다."


브런치에 글을 쓰고 싶어 일기장을 뒤적인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기록량은 줄고, 내용은 반복된다. 그 말인즉슨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늘었다는 것이고, 어울리다가 일기는 대충 쓰고 잠들었다는 것이다.




P20141126_193004078_CA255FF5-AFC1-4B7E-83EA-58B710625AEC.JPG 십자가
P20141126_202423979_1DE11605-BDB9-4CAE-B8B1-DB7F3C15FA05.JPG 허허벌판에 있는 주전부리. 쿠키를 많이 집어 먹었다.


P20141126_203208549_8C007C9B-55D7-4087-B730-48BC37724F96.JPG 아저씨 지금도, 잘 살고 있나요?


'뫼비우스의 띠지'를 들으며 순례길을 걸었지


출판계 언저리에서 근무한 적도 없는데 출판 팟캐스트 '뫼비우스의 띠지' 애청자다. 얼마 전 뫼띠 2주년 특집 '응답하라 2013' 편을 들었는데, 청취자에 대한 설문조사를 전하는 시간이었다. 오라질년과 바갈라딘은 여행지에서 '뫼띠'를 듣는다는 청취자의 반응에 구태여 여행지에서까지 뫼띠를 듣는 건 뭐냐며 신기해했다. 나의 순례길 동행자는 팟캐스트였다. '뫼띠', '빨간책방'이었다.


'뫼띠' 진행자의 드립력은 침을 모아 알약을 삼키며 걸어야 했던 삐걱 무릎의 윤활유가 되었다.

'빨책' 김중혁 작가의 문학 해설은 걸으면서도 뭔가 모르게 흔들렸던 불안을 잡아주는 버팀목이 되었다.


P20141126_215153726_A06D9102-1941-4C8D-91A7-4E9A6995A7E4.JPG 아스트로가로 가는 길목


P20141127_012903001_16D12166-661D-4C9D-8CC8-8207B2495CDA.JPG 유쾌함이 돋보였던 아재들.
P20141127_014018767_C27DE748-3231-4DEC-BF01-92046DE390A6.JPG 가우디가 만든 성은 잠시 스칠 뿐 중요한 건 맥주집을 찾는 것.
P20141127_015414405_5A1F717D-E56D-49AF-A648-501F75749998.JPG 상점에 비친 사람들을 찍고 있는데 아재가 그 뒤에서 몰래 찍는 걸 보고 웃음이 터졌다.



사람이 희망이라는 말에 알 수 없는 '진부함' 때문에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이 때처럼 사람이 신기했던 적도 없다.


"이 사람은 왜 나한테 치즈를 잘라서 주는가."

"이 아저씨는 왜 장난꾸러기인가."

"이 분은 왜 허허벌판에서 순례자를 위한 나누기만 하는가"

"여길 언제 또 올지 모르는데, 관광은커녕 엊그제 만난 사람들과 맥주 마시길 택하는건가"

"혼자 있고 싶었는데 왜 같이 있는건가."


별 수 없었다. 80명은 거뜬히 잘 수 있는 텅 빈 알베르게에서 나를 포함해 달랑 3명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잠을 청하던 때보다 아스트로가 알베르게의 좁은 방에 남녀노소 8명이 꾸역꾸역 이층침대에 몸을 뉘었을 때 꿀잠을 잤다.


알베르게 5유로

아침 4유로

카페 도네이션 1유로

세탹 5유로

맥주 1.40유로

커피 1유로

장보기 3.08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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