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세계 +정훈과 연주 #2.
"위험해"
그 때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몰고 다녔다. 좁은 오토바이 자리에는 아버지, 나, 엄마가 탔다. 나는 아버지의 허리춤을 잡고 있었고, 엄마는 좌석 꼬랑지에 간신히 매달려 탔다.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끌며 논의 가장자리를 흙으로 둘러막은 두둑 위를 힘겹게 지났다. 비포장길을 달리는 버스마냥 오토바이가 덜컹거리며 나아갔다. 그는 논두렁길에서 균형이 잡기 어려운지 여러 번 브레이크를 잡았고, 그 때마다 엔진 굉음이 조용한 논밭에 울렸던 게 기억난다.
그 때의 나는 빛에 바랜 연보랏빛 꽃무늬 원피스에 흰 면타이즈를 신고 있었다. 친할머니 성묘를 다녀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나와 엄마를 태운 채 아슬아슬 흙길을 가는데 결국 균형을 잃고 논두렁에 빠졌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하지만 논물에 다리가 빠지면서 흰 면타이즈가 젖었다. 진흙색 얼룩이 진 게 기억난다. 엄마는 그 뒤로 가끔 "너네 아빠는 성묘갈 때 오토바이 타고 가는 사람"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아버지는 터프했다. 엄마에게 얼핏 들은 얘기로 아버지는 성묘길만이 아니라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했다. 당시만 해도 오토바이로 출퇴근하는 젊은 수학교사는 드물었을테니 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그 때 사진을 보면 날랜 체구의 호남형이었다. 오토바이를 몰던 아버지는 사람도 좋아했던 것 같다. 벽장이 큰 집에는 선생님들이 자주 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 때 선생님들에게 나의 양볼을 자주 내줘야 했다.
아버지는 꿈이 많았다. 교사의 안정성을 보고 엄마와 결혼시켰다는 외할머니의 기대를 보기좋게 뿌리치고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향했다. 나는 오토바이의 덜컹거림처럼 이삿짐을 실은 용달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마냥 신났다. 서울행은 그 뒤로 현재까지도 외할머니의 단골 잔소리 0순위다. "그 좋은 선생직을 그만두다니.." 아버지는 손바닥만한 메모지에 알 수 없는 기호를 빼곡히 적어놓는 사람. 내가 고등학교 때 독서실에서 집에 가는 길, 마중나와서 뜬금없이 "꿈을 크게 가져라"라고 말한 사람.
나는 터프한 사람의 터프한 생활방식이 어떻게 온순해지는지 목격했다. 대체로 무심하게, 하지만 집요하게 지켜봐왔다. 지금의 아버지는 날랜 체구가 아니다. 풍채가 좋다고 하기엔 건강 상태가 걱정될 정도의 체구다. 거실에 몸을 뉘이고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이 그 때 그 사람인지 모를 정도다. 그러나 아버지가 쓰는 컴퓨터 배경화면이 눈에 들어올 땐 여러 생각이 스친다. 본인이 직접 설정한 듯한 배경화면이 어쩔 땐 파도가 부서지는 태평양 어느 곳, 이름 모를 휴양지, 멋드러진 갈색 벽돌 건물이 들어선 오래된 골목의 모습이다.
지인들은 가끔 나를 용감하다고 표현한다. 갑자기 회사에 사표를 냈을 때, 혼자 산티아고길 걸었다고 했을 때, 여행지에서 걱정없이 막 돌아다니는 모습을 두고 하는 말 같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가 용감하다기보다 터프하게 말 없이 사는 사람을 지켜봐왔고, 생각보다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목격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그 많던 꿈들이 사그러지는 모습을 마주해서인지도 모른다.
김금희, <너의 도큐먼트>
"사업에 실패하자 아버지는 뤼뺑이 되었다. 이삼개월에 한번씩 집에 들어왔다. 밤에 그리고 몰래. 때론 아버지가 왔다 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가, 면도기에 붙어 있는 수염을 보고 눈치채는 날도 있었다. 아버지는 대포폰을 쓰다 나중에는 공중전화로 연락했다. 어디서 자는 거야? 누가 엿듣기라도 하듯 아버지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산에서 지내. 서류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은 아버지가 산비탈을 올라가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해두고 싶었다."
"내가 아버지를 만나리라 기대했던 곳은 약수터일까, 항구일까, 역 광장일까, 차이나타운일까. 아버지를 잡아당쳐 채우려는 것은 내 도큐먼트일까, 아버지의 도큐먼트이까. 나는 어느 쪽에도 자신이 없어 지도를 넣어 다시 가방에 넣어두었다."
여하튼 아버지의 이름은 정훈, 내 이름은 연주다.
가족의 세계 + 성미와 연주 #1. 그 집에는 벽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