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세계 + 성미와 연주 #1.
"엄마, 그거 있잖아. 융단같은 천 이름이 뭐더라? 어릴 적 검정색 드레스"
"그거..벨벳"
"아, 벨벳! 그게 그 검정 드레스 맞지?"
"너 그거 하도 입고 싶다고 해서 남부시장 갔다가 동생 잃어버렸다가 찾았잖아."
"그랬나."
"그 때 동생 못찾았으면 니 동생 완전 고아됐어. 졸지에"
나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엄마에게 묻는다. 단어를 드문드문 나열해도 엄마는 내가 말하는 그 시공간에 가서 단어를 주워온다. 오늘도 그렇다. 가끔 내가 기억나지 않는 것까지 물고 온다.
여덟살때까지 살던 전주의 집은 단독 주택이었다. 넓직한 거실, 방 두 칸, 화장실, 부엌이 있는 곳이었지만 추울 땐 냉기가 돌아 단칸방(안방)에 산 것과 매한가지였다. 그 안방에는 벽장이 있었다. 내 가슴께 높이의 벽장은 크기가 커서 좁은 다락방처럼 써도 될 듯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늘 벽장을 열지 말라고 했다. 열지 말라고 할수록 열고 싶었다. 막상 드르륵 문을 열면 안쪽이 워낙 어두컴컴해서 뭔가 샥 하고 나올 것만 같았지만 그 때 당시 벽장은 미지의 세계였다.
그리고 잡동사니의 세계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물건은 개다리 소반, 알 수 없는 박스들, 낡은 앨범들이다. 누구의 물건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추측할 수는 있다. 엄마는 물건 모으길 좋아한다. 좋아한다기보다 자신이 모으는 데 취미가 있다는 걸 모르는 눈치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정리 안한다고 타박하는 게 아닐까. 따지고 보면 아버지 소유의 물건은 별 게 없다. 엄마의 관할 지역인 냉장고, 베란다, 옷장, 부엌 찬장에는 한 번도 쓰지 않아 먼지만 뿌옇게 쌓인 옷가지, 그릇들, 심지어 버리지 못한 영수증들이 넘쳐난다.
가끔 엄마의 시절이 궁금하다. 막상 "엄마가 학생일 때 말이야~"라는 말이 나오면 바로 그 다음 문장이 예상돼 귀는 열어두되 정신은 딴 세상으로 가지만. 엄마는 잡동사니를 모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 어릴 적 내가 그렇게 갖고 싶었던 검정 드레스처럼, 본인 스스로에게 준 게 잡동사니였던 걸까. 엄마는 남들보다 이르게 나를 낳았으니까. 하고 싶은 일보다 해줘야 할 게 많았을 거다. 벨벳 드레스를 사기 위해 여섯 살짜리의 나와 세 살터울의 동생을 데리고 시장에 낑낑대며 갔을 거다. 그 때 나는 너무 통통했고, 엄마는 너무 마른 장작개비 같았다.(당시 사진을 보니까.)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 <칼자국>에서 '어머니'를 표현한 문장이다. 소설 속 엄마는 평생 부엌에서 '새끼'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생계'를 위해 국수를 말던 사람이다. 누구나 엄마의 일부분이었을테지만 정작 '엄마'를 온전히 알기 어려운 사람이다. <칼자국>의 엄마처럼 나의 엄마는 무심하지도, 억척스러움이 넘치진 않지만 여기까지가 내가 엄마에 대해 아는 수준이다. 소설 속 딸은 어머니의 장례식을 앞두고서 다시 엄마를 떠올린다.
"어머니는 칼 하나를 25년 넘게 써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여하튼 엄마 이름은 성미, 내 이름은 연주다.
가족의 세계 + 정훈과 연주 #2. 오토바이 타다가 논두렁에 빠진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