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은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야말로 부모를 잃은 앤. 앤은 파양까지 당할 뻔 한다. 초록지붕의 집의 마릴라와 매튜가 원하던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앤은 낙담하지 않는다. 앤은 가까스로 초록지붕의 집에 살게 되면서 일상의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게 받아들인다. 무뚝뚝한 마틸다의 말 한 마디에 호기심 있는 눈빛으로 답하고, 마틸다의 요리 솜씨에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빨강머리 앤이 만약 엄마를 만나게 된다면, 어떤 눈빛으로, 무슨 말을, 그리고 어떻게 손을 내밀까. 우리는 누구나 엄마로부터 태어났지만, 어쩌면 나이 들수록 ‘고아’임을 자처하며 세상을 떠도는 데에만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세상은 새로운 빛과 사물로 가득 차있지만 엄마의 세계는 어제와 오늘이 같고, 별 게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정말 우리의 엄마는 그러할까. 여기가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또 복수야?”
“어.”
“비슷한 얘기를 뭐 하러 매일 봐.”
“그냥 둬봐.”
오늘도 어제처럼 엄마는 일일극을 보고 있다. 다른 채널로 돌리려다 그만뒀다. 한 번도 보지 않았지만, 스치듯 처음 봐도 알 법한 내용이다. 내가 사랑한 남자가 알고 보니 원수의 아들. 가장 믿었던 친구가 뒤통수를 친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내가 사랑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쌍방의 애정 관계가 복잡한 삼각관계로 치닫고, 혈연과 악연이 겹쳐지고, 필연이 우연이 되고, 우연이 필연이 되는 이야기. 등장인물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폭주기관차처럼 복수의 향연을 펼치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 엄마는 뻔히 스토리 전개를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드라마에 어제도, 오늘도 빠져든다. 이제 곧 ‘TV 제로 시대’가 될 거라는 전망을 보기 좋게 뿌리치고 ‘막장 드라마’를 ‘본방 사수’하는 이른바 ‘드라마 마니아’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니, 엄마가 리모컨을 내게 건네준다. ‘보고 싶은 거 보라’는 허락의 의미다. 채널을 돌리다 여행 프로그램에서 채널이 멈춘다. 유럽 어디쯤이다. 텔레비전 화면인데도 청명한 공기가 느껴질 정도다. 채널을 돌린 사람은 난데, 정작 크게 반응하는 사람은 엄마다. “저거 진짜 맛있겠다” “호수 풍광 좀 봐. 걷기에 딱 좋겠다. 그치” 엄마의 목소리에는 부러움이 한껏 담겨 있다. 짤막한 간접 여행이 끝나면 가끔 따라 붙는 말이 있다. “죽기 전에 언제 저길 가볼 수 있으려나.” 올해 가보지 뭐. 흔쾌히 대꾸하면 좋았을 텐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비행기 대신 화면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 텔레비전이 없었다면, 엄마가 무얼 좋아하는지 알았을까. 가만… 엄마가 무얼 좋아했더라. 그리고 무얼 싫어했더라.
대학 시절부터는 해외 여행지를 보물처럼 여기며 배낭여행을 다녔다. 아시아부터 유럽의 땅 끝까지. 첫 여행지는 터키 화산 폭발로 인해 불가사의하게 기암들이 솟아 올라있는 카파도키아(Cappadocia) 였다. 중세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왕조의 침공을 피하기 위해 동굴이나 바위에 구멍을 뚫어 석굴 도시를 건설해 신앙을 끝까지 지켰다는 곳이다. 나는 낯선 땅에서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친구와 함께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저 멀리 동굴이 보였다. 친구가 바짝 뒤따라오며 말했다. “거기는 무섭다. 그만 돌아가자.” 나는 답했다. “그냥 가보지 뭐.” 우리는 나름 용감하게 끝까지 돌아다녔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 도착했을 땐 호기심이 가득 찬 눈빛의 쌍둥이 무스타파 형제가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우리는 한사코 초대를 거절했다. 씩씩해 보여도 막상 ‘사람 탐험’에는 머뭇거렸다.
나는 어릴 적부터 보물찾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보물찾기를 할 때면 술래가 되어 보물을 어디에 숨겼을 지 상상하고, 샅샅이 이곳저곳을 뒤져보는 게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보물찾기가 시작되면 주위 풍경이 죄다 달라 보였다. 아름드리나무도, 흙더미도,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달리 보였다. 또한 보물찾기는 ‘얼음땡’처럼 누군가 살고, 죽지도 않고, 상대편의 땅을 차지하지 않아도 됐다. 온전히 혼자만의 탐험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물론 보물찾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찾았다’라는 외침이 들리면 초조해졌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눈에 불을 켜고 주위를 살폈다. 분명 어딘가에 보물이 있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애써 보물을 찾아도 ‘꽝’이 나오기도, 막상 보물을 찾은 데 대한 선물이 기대에 못 미치기도 했지만.
엄마의 세계는 무(無) 탐험지대다. 비무장지대라는 말도, 사각지대라는 단어는 들어봤지만, 무(無) 탐험지대라니. 잘 알고 있는 듯해도 미지의 영역이 있다. 도무지 의지를 갖고 나서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세계이다.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처럼 쉬운 말도 없지만 그 마음먹기처럼 어려운 일도 없다. 이 세상에서 흔해 빠진 사람은 엄마. 나는 엄마의 딸이고, 엄마는 엄마의 딸이고, 할머니는 할머니의 엄마의 딸이다. 보물찾기에 나서듯 여행을 떠날 땐 온갖 정보를 섭렵할 정도로 나서지만, 막상 내 곁에 늘 있는 엄마에 대해 제대로 파고든 적이 없다. 그래서 시작했다. 엄마의 뒤꽁무니를 따라가 보자. 어릴 적 보물찾기할 때처럼, 빨강머리 앤이 시를 읊고, 다이애나에게 얘기하듯, 그의 숨은 시절을 탐험해보자. 이렇게 엄마 ‘몰래’ 엄마의 과거로 여행을 떠난다.
‘흔한’ 엄마
어머니를 부르는 통칭. 대부분의 사람들이 태어나서 처음 배우는 단어 중 하나. 마마, 마미 등 각국 별로 엄마라는 단어는 다양하다. 어릴 때는 엄마라고 부르다가 성년 이후에는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엄마보다 어머니라고 부르면 뭔가 철 들었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물건을 도저히 찾지 못할 때 ‘엄마’를 부르면 해결된다는 말도 있다. 난생 처음 엄마가 된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가 ‘엄마’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을 때를 고대한다고 한다.(친구들 말에 따르면) 물론 일각에서는 모성애를 두고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를 두고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다.(이 또한 친구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르면). 여하튼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몇 번의 '엄마'를 불렀을 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는 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