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떼야에서 로스 아르꼬스(Los Arcos)까지
일관실기 첫 번째 프로젝트는 '발끝따라걷기' 2014년 11월 6일부터 12월 9일까지 스페인 순례길 산티아고길을 33일간 걸었다. 아주 뒤늦게 스페인 팜플로냐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걸으며 썼던 기록을 정리해본다.
아침 7시 50분에 출발해서 오후 1시 20분에 로스 아르꼬스(Los Arcos)에 도착했다. 22.9km를 걸었다.
도시 에스떼야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마음에 들었던 곳이었다. 이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묵은 빨래를 했고, 같은 알베르게에 머무는 사람들과 근처 마트에서 장을 봐서 파스타를 해먹기로 했다. 이름만 기억나는 캐나다인 알렉스는 요리를 참 잘하는 친구였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마음을 먹고 있으며 노력하고 있지만 꼰대스러움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올 때가 있나 보다,라는 깨달음을 준 사람이다.
알렉스는 나보다 네댓 살 어린 친구였다. 요즘 한국에서 불고 있는 '먹방', '셰프' 열풍, 이미 스페인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는 알렉스 솊의 먹방 열풍이 불고 있었다. 알렉스는 요리를 잘했다. 장을 볼 때마다 워낙 많은 양의 먹거리를 사서 혀를 내둘렀다. 그는 아침형 인간이었고, 이른 아침에도 늘 콧노래를 부르던 사람이었다. 느슨했다. 어디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면 알렉스였다. 평온을 찾는 길 위에서, 쉼을 찾는 알베르게에서 장소 불문하고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릴 때가 있었다.
나는 바게트, 우유 한 팩 정도를 살 때 알렉스는 너무 많다 싶을 정도로 장을 봤다.(알고 보니 같이 다니던 동행들과 더치페이한 장보기였지만) 알렉스와는 순례길에서 여러 번 같은 알베르게에서 머물렀다. 그는 파스타를 만들면 같이 공간에 머무는 순례자들에게 권했다. 나도 수차례 얻어먹었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만 콧노래를 흥얼거린 적이 없다. 여기서 꼰대 근성이 드러난다. 이 친구는 나보다 어린데, 나보다 여유 있고, 넉살 좋고, 배려하고, 잘 웃는다는 걸 발견하고 비교한다는 것.
나도 예상치 못한 순간, 나의 상식, 시민의식, 관용, 태도를 가늠하게 된다. 바닥은 생각보다 얕다.
평이하니까 생각이 없어
"오르막길 내리막길 없는 평이한 길이었다. 하지만 에스떼야 도심에서 빠져나올 때 날이 어두워 길을 헤맸다. 다행히 앞에 먼저 앞서가던 분이 뒤통수에 눈이 달렸는지 나를 불러 세워서 길을 다시 찾았다. 평평하게 길게 뻗은 길을 걷다 보니 무얼 느껴보러 시도했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무얼 위한 걸음인지 자문해보다가 그저 배낭이 무겁다는 생각만 들었다"
까미노 초반에는 길을 걸으면서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길을 걷는 의미를 캐묻는 일이다. 어쨌든 적잖은 시간을 '투자'했고, 고된 노동을 '투입'하기 때문이다. 종교가 있다면 설명이 가능하지만 나처럼 무교이면 설명이 필요하다. 왜 걷느냐. 무교인들이 길을 걷는 건 '한(恨)이 많아서'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던데 재미로 넘기지 못했다. 나는 어떤 한이 맺힌 거지? 어맛.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없어 한의 실체를 찾아 한풀이를 좀 할 수 있을까 싶었더니 무념무상의 세계를 들어섰다. 걸었다. 발자국 수를 세는 사이 로스 아르꼬스에 도착하는데..
#돌이켜보니
퇴근하고 브런치를 쓰는데 사진을 보며 더듬더듬 기억을 떠올리고, 그때 기록한 일기를 뒤적인다. 이렇게 맥락 없이 써도 되나 싶다. 한편으론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그렇다면 독자를 위해 정보를 남겨야 하나, 유머를 써야 하나 등등 내가 소질 없는 스킬에 대한 욕심이 불타오르는데 그 결과물이 오늘이다. 그때 만난 알렉스는 캐나다에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침잠에서 깨어나고 있을까. 알렉스가 만들어준 파스타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