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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너울 Jan 13. 2021

프롤로그; 우울의 기록, 우울의 시간


 나의 우울을 돌아본다. 무엇이든 기록하고 싶은 성미가 여기서도 발동한다. 우울이란 바다에 빠져 있던 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건 아니다. 어떤 것은 그냥 받아들였다. 어떤 일은 그저 흘려보내는 게 나았다.


 그러나 우울증 자체를 지우고 싶지 않다. 즐거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시간 또한 엄연히 내 것이기에. 내 존재를 부정할 정도의 우울감은 중학생 때 한 번, 고등학생 때 한 번 나를 먹구름처럼 덮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20대 후반에 나를 찾아온 우울감은 훨씬 짙었다. 이 또한 지나갈 거라며 담담하게 감내하려던 우울감은 이번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나를 떠나가지 않았다. 더는 이전의 방식으로 살 수 없게 된 시점이 온 것일지도 모른다. 20대 후반의 금싸라기 같은 시간. 살려고 버티다 보니 나를 알게 된 시간이었다. 그 과정을 기록하려고 한다.


 우울증 전에는 싫어하는 것들로 나를 규정했다. 싫은 걸 피하고 피하다 보면 취약해진 나만이 남았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것, 기쁨을 느끼는 순간들로 나를 이해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들의 실체를 보고 극복할 힘이 생긴 것 같다. 우울증을 치유하며 알게 된 나, 내가 버려야 할 것들. 잘못된 사고를 바로 잡는 날들 속에서 수긍한, 나는 행복하게 살 자격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시도했던 일들이 담긴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 마음속에만 두지 않고 글로 남겨두면 비슷한 시간을 지나고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소망하며.


 무엇보다, 언젠가 또 인생에 고난이 찾아올 때를 대비해 나만의 셀프케어 지침서를 만들어두고 싶다. 힘들 때 무엇으로 버텼고 어떤 말로 나를 환기했는지를 글로 맺어 보려 한다. 우울이 깊어지기 전에 뭘 하면 한층 쉽게 빠져나오는지에 대한 것들을. 살려고 분투한 흔적들이, 미래의 나에게 방향키가 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주지 않을까. 비록 닥친 상황이 완전히 같지 않더라도 조금은 든든할 것 같다. ‘예전에도 이겨냈잖아.’








 어떤 사건을 기록하고 의미를 찾으려면 그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알아야 한다. 역사적인 사건 옆에는 연도와 일자가 적혀 있고, 하다못해 핸드폰 카메라로 짧은 영상을 찍어도 촬영 날짜와 시간이 붙는다. 같은 행동이라도 어느 시기에 했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울증을 앓던 기간을 깔끔하게 떨어지는 숫자로 표기하기엔 어려움이 많더라.


 우울증을 인지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 탓이다. 내가 어떤 상황인지 몰라 한참 헤맸다. 길을 걷다 힘들어서 멈추고, 필기하다 펜을 툭 떨구고, 급기야는 식사 중에 손이 자꾸만 숟가락을 툭툭 놓쳐댔다. 그런데도 내게 이상이 있으니 도움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다. 툭하면 눈물이 나서 이상할 법도 한데 그땐 그랬다.


 내 상태를 감추고 버티다 보면 언젠가 다시 바쁘고 ‘평범한’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가 문제없이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몸은 계속 멈춰서 쉬라고 신호를 줬는데 쉬면 낙오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이 상태를 ‘들키면’ 평범함의 틈에 다시 못 들어갈 것 같았다. 내가 심각하게 아프다는 걸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아니, 직시할 기력조차 없었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굉음 없이 서서히 무너진 일상이었다. 그래서 이 기간이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였는지 잘 모르겠다.


 상담실을 찾아가 본격적인 치유 국면에 들어선 이후에도, 특정한 날짜를 콕콕 집어 우울의 시간을 되새기기엔 무리가 있었다. 우울증을 앓는 동안 떨어진 인지능력 탓이다. 기억력과 집중력이 심하게 떨어졌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기란 참 희미하다. 당장 전날 만나 밥도 먹고 거리를 걸으며 대화한 친구의 얼굴이 기억 속에서 흰 종잇장처럼 비어 있었다. 그 친구가 누구였는지 떠올리는 데 한참 용을 썼다. 바로 전 끼니를 무엇으로 때웠는지 답하기 힘들 때도 있었다.


 상담을 시작한 후로, 외면하던 마음을 들여다봐야 했기 때문에 처음 몇 달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과 함께 산 것 같다. 너무 무겁거나, 날카롭거나, 불로 지지듯 고통스러운…. 감각으로 다가오는 감정들이 나를 압도했다. 자연히 눈앞의 일들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인지 어떤 시간은 그저 뭉텅이로 흘러갔다. 외출할 기운도 없었기에 사는 모습이 비슷비슷해서 시간이 더 덩어리처럼 흘러갔는지도 모른다.


 퍽 밋밋한 외양의 일상 속에서도 사실 내 마음은 분노와 불안과 자책으로 뒤엉켜 있었다. 마음의 병은 단순한 넘어짐이 아닌데도, ‘넘어진’ 후 한참을 못 일어나는 내가 미웠고 그 상황에 일조했다 여겼던 무언가 혹은 누군가에게 화가 났다. 그때의 나는 언제까지 넘어진 자리에 엎어져 있을지, 그동안 내가 얼마나 뒤처질지를 불안해했다. 감정인지 사고인지, 사실인지 짐작인지 구분되지 않는 그 순간에 매몰되면 그나마 해낸 일도 빛이 바래고 못한 일은 고스란히 죄책감으로 남았다. 그러니 그 나날들을 다 기억하고 살면, 그것도 고문일 것이다.

 

 그래도 기억을 되살릴 방법은 있다. 활화산처럼 감정을 분출한 사건들을 떠올리거나, 그때를 버티게 해 준 것들로 고통의 시간을 돌이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날카로운 감정, 울음, 싸움으로 그 시기를 되짚기엔 감정 소모가 극심하다. 이런 식의 복기는 내 소중한 사람들-가까이 있는 만큼 내게 상처도 도움도 많이 준-을 잠시나마 다시 미워하는 일이 될까 두렵다. 이 또한 담담한 경험담으로 적을 수 있는 날이 올지 모르나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후자의 방식을 택했다.



경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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