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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너울 Aug 15. 2023

불투명을 헤엄치다가

탈진해버리고 말았지.

약 5년 전에 나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우울의 심해에 잠겨들 때도 상태가 심각했지만 전과 다른 차원으로 일상에 마찰을 잔뜩 빚기 시작한 때는 치료 국면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우울증의 원인은 참 다양하지만 내 경우에는 대학원 생활에서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중압감, 그리고 그런 내 감정을 수용해 주지 않는 부모님에 대한 불만이 주요한 이유였다. 


지도교수님의 은퇴는 다가오는데 졸업논문 연구 피드백은 가뭄에 콩 날 만큼 이뤄졌다. 나이는 빠짐없이 먹는데 나는 언제 졸업해서 언제 돈을 벌지? 설상가상 우울증 때문에 연구 능률이 급속히 떨어지며 안 그래도 더딘 연구 속도는 거북의 움직임처럼 더 느려졌다. 교수님을 뵈어야 하는 날에는 긴장해서 위장약과 지사제를 달고 살았고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우울증 증상 중 하나로 독해력이 떨어져서 논문을 읽고 소화하기가 너무 버거웠다. 연구를 제대로 못하니 교수님 앞에 가면 더 긴장하고, 더 작아졌다. 그 무능력의 경험으로 인해 더 우울하고 불안해지는 악순환에 빠졌다.


이제 와서 학업을 접기엔 들어간 자원과 시간이 너무 많았고, 학부 졸업 후 바로 대학원에 와서 다른 경력도 없었다. 답은 최대한 빠른 졸업 밖에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도저히 논문을 완성할 자신이 없었다. 당장 자료 한 장 읽기도 너무 힘이 드는걸. 하루하루 불투명해지는 듯한 미래 앞에서 나는 옴짝달싹 할 수 없는 현재라는 덫에 걸린 것 같았다.


학교 도서관에 앉아 있을 때면 수많은 장서들이 내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지는 장면이 떠오를 만큼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언제 설렘이나 안정을 느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폭은 갈수록 좁아졌다. 감정불능 상태가 되어서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은 긴장감, 불안감, 그리고 공포감 정도였다.  

차에 치이거나 떨어진 간판에 맞아서 학교에 안 가고 싶었다. 내 상태가 이미 정상이 아니어서 나는 부모님께 휴학이나 학업 중단 얘기를 꺼내봐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면 그만 두면 되지, 싶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때 나는 휴학의 ‘휴’ 자도 스스로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냥 뭔가가 내 일상을 멈춰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만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가까스로 대학원이 너무너무 힘들다는 말을 했었는데 엄마, 아빠는 그걸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옛날부터 ‘힘들다면서 어쨌든 해내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빠는 어느 날 저녁 광화문 근처에서 나와 만나서 밥 한 끼를 먹고 나를 격려해 줬다. 나는 나 힘들다는 말을 한 것만으로 이미 진을 다 빼서 다른 판단을 하지 못했다. 내 상태의 심각성이 전달되지 않았으니 더 자세히 얘기해야 한다는 판단 같은 것 말이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한 학기를 더 보냈다.


그동안 나는 속으로 더 곪았다. 버스에 앉아 울면서 학교에 갔고 눈물을 비처럼 길게 흘리면서 길을 걸어 다녔다. 필기를 하다가 손에 힘이 빠져 번번이 펜을 놓쳤다. 만족감을 느끼는 뇌의 어느 부분이 고장 났는지, 아니면 그걸 느끼게 해주는 호르몬 작용이 잘못됐는지 한 끼 식사를 다 먹어도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원시적으로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이 식후 포만감이었는데 그것도 잘 느껴지지 않자 나는 음식을 평소보다 더 밀어 넣었다. 0.5 인분 정도 더 밀어 넣는 행위가 사실은 힘겨웠는데도 당시에는 잘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살려면 만족감을 느껴야 한다는 무의식적이고 전도된 강박 때문이었다. 


언제는 본가 근처에서 가족 외식을 하러 갔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불안감에 나도 모르게 테이블에 깔린 종이를 죽죽 찢고 있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뭐가 불만이냐고 화를 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는 엄마가 나를 위로해 주길 바랐다는 것을 늦게 깨달았다. 내 감정을 수용받고, 따뜻한 위로 받기를 원했다. 


이후 몇 번 더 힘들다는 표현을 했지만 부모님은 나의 미래를 더욱 신경 쓰셨고 내 상황에 대한 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절망스럽고 나는 점점 더 내 목소리 내는 법을 잊어갔다.  


그때쯤 교통사고가 났었다. 다행히 어디가 부러지거나 내출혈이 생긴 건 아니었다. 그래도 머리와 목, 허리가 너무 아팠었는데 그때 나도 미치고 엄마 아빠도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아무도 학교를 쉬자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엄마는 한 학기 끝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힘내자고 했다. 미련한 데다 생각할 힘을 잃은 나는 이미 수료 요건을 다 채운 상태였는데도 학기 끝까지 아픈 목을 부여잡고 학교를 다녔다. (아, 이때 얘기를 쓰고 있자니 다시 목 뒤와 정수리가 얼얼하게 아파오는 기분이다.) 





자료를 붙잡고 있어도 진도란 것이 전혀 나가지 않는 상태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때 연락이 잠시 끊겼던 친구 B에게서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B와 간간히 얘기를 이어갔는데, 마침 대학에서 심리상담을 전공한 그녀는 나에게 학교 상담실에서 심리상담을 받아보라는 말을 해줬다. 나는 이번 소논문 발표만 끝나고 학교 상담실에 상담 신청하러 가겠노라고 방문을 차일피일 미뤘지만 그녀의 끈질긴 권유 덕에 상담실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상담 신청을 했다고 해서 상담을 바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마음이 힘든 학우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이미 그들의 신청이 많이 밀려 있어서 나는 몇 달 후에야 본 회기에 들어갈 수 있었다. 4차 학기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교통사고 후유증 회복을 이유로 한 학기 쉴 수 있었다. 한 학기 쉬면서 학교 상담실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사촌 언니가 추천해 준 사설 심리 상담 센터에 몇 차례 방문했다. 


이때부터 엄마와 나의 심각한 반목이 시작되었다. 전부터 상담실 문지방 넘기를 두려워했던 이유가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담받으며 내면의 상처를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올 것이란 불안감은 적중했다. 


상담실에 들어가면 크리넥스 휴지를 참 많이도 쓰고 나왔다. 입만 열면 곧 눈물이 터져 나와서 그랬다. 상담을 시작하면 내 얘기를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나는 엄마 얘기를 구구절절히 했다. 엄마에 대한 서러움, 불만, 불신, 분노 등등 다채로운 부정의 감정들과 질퍽한 애증이 마구 흘러나왔다. 그리고 엄마 얘기를 하고 돌아온 날이면 엄마와 징하게도 싸웠다. 그걸 지켜보는 동생도 중간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렇게 싸우고 나면 나는 상담받는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비싼 돈 내고 상담을 다녀와선 당신한테 분노를 쏟아붓는 딸을 이해할 수 없어했다. 


이 얘기를 다음 회기에 전했더니 돌아온 상담사 선생님의 답변은 명료했다.   


“원래 그래요. 가족 얘기하고 간 날이면 많이들 싸워요.”


요컨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 하니 그건 다행이었지만 오래 묵은 상처를 찾아서 게워 내는 일은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병원에 가면 가끔 의사 선생님이 촉진을 하지 않나. 여기 누르면 아파요? 여기는요? 그런 것처럼 50분의 상담 시간 동안 내 얘기를 하며 발이 걸려 넘어지는 지점들을 알아가곤 했다. 그런데 이제 아픈 부분을 누르면 곧바로 구토를 하는 것처럼 반응이 엄청났다. 


그렇게 알아낸 나의 가장 아픈 부분은 엄마에 대해 느끼는 야속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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