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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그루 Jan 05. 2023

1. 엄마처럼 살기 싫었어

저의 사춘기는 조용하고도 강렬하게 흘러갔습니다. 한창 예민한 시절에 너무나 가난한 우리 집이 싫었고, 특히나 새벽부터 새벽까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일을 하는 부모님의 직업이 부끄러웠습니다.


왜 우리 아빠는 사업이 망했을까?

왜 우리 아빠는 사기를 당했을까?

왜 우리 엄마는 아빠랑 결혼했을까?

왜 우리 집은 농사를 지을까?

왜 우리 부모님은 매일매일 쉴 새 없이 일하지만 늘 가난할까?


우리 아빠가 농부라는 것도 싫었고, 아빠 하나 바라보고 친정도, 친구도 없는 진도에 내려와 고생만 하는 엄마를 보는 것도 싫었습니다. 이렇게나 싫은 진도를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듯 저 멀리 있는 도시로 진학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등바등 살았습니다. 뚜렷한 목적은 없었지만 시험기간에는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공부를 했고, 동기들에게 날을 세우면서까지 점수에만 집착했습니다. 잠을 쪼개가며 대외활동과 아르바이트도 병행했습니다. 스펙이라는 것이 쌓이고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사던 어느 날, 수화기 너머 저 편에서 엄마의 한 마디가 마음을 후볐습니다.


"너는 남들처럼 이력서 한 줄 채우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 거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정말 죽을힘을 다 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칭찬 한 마디는 못하실 망정. 그렇게 원망이 생기려던 찰나, 뒤를 잇는 엄마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지금 당장 너무 힘들어서 놓아버리면,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를 믿고 함께 해주신 사람들이 너무 아까워."


당시 엄마는 고된 농사일, 늙은 시부모님을 모시는 일, 집안일 외에도 블로그를 통해 농산물 택배 주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 때 엄마의 처지가 끔찍이도 서러워서 인터넷 한 칸에 하소연처럼 일기를 올렸는데, 그것을 계기로 도시의 소비자들과 직거래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낮에는 밭에서 농사를 짓고, 밤에는 컴퓨터 앞에서 사람농사를 짓다 보니, 상처받은 마음은 치유되어가지만 몸은 부서질 듯 힘들었답니다. 그래서 제 생각이 나셨다고 했습니다. 졸업을 하고 내려와서 함께 해 보면 어떻겠냐고 하셨습니다.


실은 저 역시 밉다, 싫다 하면서도 마음속 한편으로는 시골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었고, 우리나라 농촌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 친척들, 이웃들이 너무나 힘들게 일하면서도 제 값 받지 못한 채 농산물을 팔아야 하는 이 상황을 개선하고 싶었습니다.


막연한 바람만 있었지 구체적인 방법을 몰라서, 농산물유통이나 마케팅과 관련된 큰 회사나 기관에 들어가야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공을 바꿔 경영학을 공부했습니다. 전공수업이나 자격증, 대외활동, 스터디 등 모든 '이력서 요소'들을 회사를 위해 '조립'했습니다. 그렇게 조립된 이력서를 가지고 한 식품회사 마케팅팀의 인턴으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입사 첫 주의 열정은 아주 빠르게 식었습니다. 기대하던 근사한 기획이나 우리나라 자국농민을 위한 사명 같은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대신 커피 심부름과 파쇄, 홈페이지에 달린 악플 지우기 등의 무료하고 의미 없는 시간들이 채워졌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좀 더 나아서 좋은 경험이었다고 회상할 수라도 있어졌지만)


그러던 와중, 가장 친한 친구의 사고소식이 찾아왔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한 순간에 떠나버린 친구는 그 당시 제게 거대한 계시처럼 다가왔습니다. 남들을 위한 성공이 아닌, 너 자신을 위한 행복을 찾아. 좋아하는 사람들 곁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 친구를 완전히 떠나보내던 날,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에 홀린 듯, 일주일 뒤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엄마, 나 진도에 내려갈래.


엄마처럼 살기 싫어서 도망치듯 떠난 진도에, 엄마와 함께 살고 싶어서, 어쩌면 엄마처럼 살고 싶어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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